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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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대체로 엄마라는 말을 가장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맘마 응가 등과 함께 아빠를 배운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아기 때 성립된 그 따스한 보호자와 위안적 존재인 아빠-딸의 관계에서 평생동안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오는 나이를 시점으로 해서 대개 아빠라 부르는 걸 멈춘다. 아빠가 아버지가 되면 아기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어르고 달래고 받아주는 아빠로서의 역할은 끝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가부장적 권위가 전면에 부상한다. 기성 세대의 아버지들은 어쩌다 보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그에 따른 (별로 알아주지 않는) 권위로 인해 가족의 유대에서 스스로 소외시키는 역설적 위치에 선다. 이 가여운 아버지들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틀을 깨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가장의 위치와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는 가정에서의 남자의 위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 채 자주 길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유리된다.

아빠가 아버지가 되면 아버지는 고독해지고 아들은 독립적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모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한다. 극복은 쉽지 않다. 오이디푸스도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했다. 예언을 피해, 자신의 왕국조차 포기하고 떠돌던 오이디푸스가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야 말았던 이유. 그것은 동서양을 떠나 아들에게 아버지는 분리될 수도 극복될 수도 있는 대상이 아니고,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 시대의 아버지들

망국과 해방과 전쟁과 독재를 경험했던 아버지들은 ‘공회전하는’ 역사 속에서 온 몸을 갈았다. 살아남기 위해, 가족의 밥벌이를 위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무거운 역사의 하중을 견디고 또 견디며 자신의 씨를 뿌렸고, 견고한 고독 속에서 사회의 얹어리에서  천천히 스러저갔다.  김훈 작가는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실린 <광야를 달리는 말>에서  ‘술주정뱅이에다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는’ 아버지가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던 말을 기억하며 이렇게 회상한다.


말을 달릴 선구자의 광야가 이미 없다는 것은 나는 좀더 자라서 알았다. 아버지는 광야를 달린 것이 아니고, 달릴 곳이 없는 시대의 황무지를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 광야를 달리는 말(라면을 끓이며) 에서

작가는 여러 매체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쓰고 있다고, 썼다가 지웠다고,  혹은 쓰다가 못썼다고 전했다. 작가가 말하는 아버지는 비단 김훈 작가의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시대의 얹어리를 살다 간 수많은 당대의 아버지들, 시대와 부딪치고 시대에 저항하며 그 몸서리치게 반복되는 시대의 황무지를 좌충우돌 하면서 몸을 갈던 시대의 아버지들이다. 몇 안남은 김훈 작가 세대의 아버지들인 몇 안남은 그들은 지금 몇 줌 안남은 마지막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내 쉬며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언뜻 언뜻 소설 속에 내비치지만, 작가의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더 많은 아버지들이 작품 내에 녹아 있다.

작가 스스로 작품을 초라하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작품이 긴 호흡을 가진 서사를 만드는 대신 작은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인 듯 싶다.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생의 긴 인생 행로를 종으로 비추지 못하고 그들의 옆구리를 이곳 저곳에서 찔러 단면만을 보여주다가 말아 버린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은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거나, 아버지와 타협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와 화해하지 못한채 서로 분리되지도 유리되지도 못한 채 서로의 삶의 얹어리들을 스친다.

죽음의 시간들

죽음을 직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문학적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작가의 위대함을 본다. 소설은 아버지가 죽어가는 시간에서 시작한다. 아버지 마동수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전방에서 휴가나온 아들은 가정을 지키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둘 사이를 흐르는 불편한 기운을 느낀다. 죽음 직전의 무력과 아들을 향한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을 본다. 그리고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가는 의식의 흐름을 그토록 아름답게, 김훈다운 언어로 표현하였다.


시간은 마동수의 생명과는 무관하게, 먼 변방으로 몰려가고 있었는데, 마동수의 육신은 그 시간의 썰물에 실려서 수평선 너머로 끌려가고 있었다. 마동수의 마지막 의식은 죽음이 이끄는 썰물에 실려서 먼 수평선 너머로 흘러갔다가 다시 밀물에 얹혀서 이승의 해안으로 떠밀려 오기를 세 번 거듭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혼백이 먼저 육신을 떠나서 멀어졌고 다시 몸속으로 돌아왔다.

물이랑 너머에서 죽음의 세상은 펼쳐져 있었다. 생명의 맨 끝자락에서 모든 감각이 바스러졌고, 그 자리에서 죽음의 세계에서만 작동되는 낯선 감각이 돋아났다. 그것은 청각도 시각도 아니었지만 그 감각으로 마동수는 물이랑 너머의 세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시간은 발생 이전의 습기로 엉겨 있었고 진행의 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안개로 풀어져서 허공에 밀려다녔다. 그 뿌연 시간의 안개가 갈라지는 틈새로 물이랑 저편의 세상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풍경은 오직 적막했다. 거기에서 죽은 자들은 끝없는 벌판을 제가끔 건너가게 되어 있어서, 서로 만날 일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서 안개의 틈새가 메워지고, 마동수는 다시 이부자리 위로 떠밀려 왔다. 그때 마동수는 얼핏 혼수에서 벗어났다. 천장의 도배지 무늬가 마동수의 의식을 잠깐 붙들어주었다. 그 도배지는 저승의 무늬로 보였다.

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그 분들의 의식의 바닥은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속을 있을까가  하염없이 궁금하고 슬펐었다.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롤모델이 없는 아들은 아버지를 인생에서 끊어내는 것만이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고, 인생을 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를 피해, 가족을 떠나 살아가는 아들의 인생은 아버지의 것과 그닥 달라보이지 않는다. 배경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삶. 가족을 떠나 베트남에 참전하고 괌에서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하는 듯 보이는 큰아들 마장세는 아버지를 극복하려다가 스스로 아버지가 된다.

가난으로부터 구제되지 못한 두번째 아들 마차세는 스스로 사랑으로 일군 가정에서, 아버지를 극복하는 듯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추운 전방에서 휴가를 받았던 동생은 형 없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치매 어머니의 요양원 비용을 댄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그에게 일자리가 주어질 리 만무여서, 결혼 후 오랜 실직과 오토바이 배달을 하기도 하는 등 위태롭고 고단한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따스한 그의 아내 박상희가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족과의 끈을 잡으려는 박상희의 노력은 실질적으로 형과 동생 사이의 어떤 관계의 개선을 이루어낸 것은 아니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정신적 덫과 마음의 짐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게 하는 데 기여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즉 가족을 끌어안고자 하는 박상희의 정신이 가족을 극복하도록, 현실을 살아내도록, 주저 앉거나 밀려나지 않고 그대로 현실 속에 버티고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거라고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아버지가 남긴 모든 정신적 유전자적 유산을 끊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자신만의 인생, 자신만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일은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혼을 하는 이유는, 세대와 세대를 흐르며 끊임없이 유전자들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서로와 서로에게 거울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변화하도록, 세계가 늘 새로와 지도록 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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