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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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의 뒷 이야기는 아마도 이 책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어찌 저찌 하다보면 고등 교육을 받고도 가정이라는 굴레에 갇혀 존재감없이 지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여성들이 많은데, 여성들이 사회생활이 단절되는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혼 여성에게는 양육이라는 대업이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고 이를 완수한 후에 뒤돌아보면 날마다 새로와지는 사회에 뒤떨진 듯한 좌절감이 큰 이유 중 하나다. 


63세의 브릿마리의 평생 직장이라는 것은 결혼 전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것이 전부이다. 40여년간을 남편의 아이들을 돌보고, 커트러리를 정리하고, 과탄산소다를 이용해서 집안을 구석구석 정리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장을 보고, 반짝 반짝 윤이나게 식기와 집안 물건들을 닦고, 남편의 옷을 다리고, 6시 정각에 저녁을 차리고, 그렇게 집안을 관리하는 일이 그녀의 일이고, 그녀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남편이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살림만 하며 살아가던 브릿마리가 집을 나와 직업 소개 센터를 찾아가는데, 그가 일해야 하는 이유가 서늘하다. 늘 반짝반짝 닦고 정리하고 매일 같은 시각 해가 뜨듯 모든 것이 정해진 자리에 정해진 시간에 있어야 하는 그녀지만, 혼자가 되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면, 주위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혼자 썩어가게 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언젠가 죽음이 찾아왔을 때 혼자 죽어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매일 같은 시간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게 되면 어느날 자신이 사고로 죽더라도 그녀가 일하던 일터는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될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1주일 이상씩 주위에 냄새를 풍기며 홀로 썩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그녀가 직장을 찾는 이유다. 


요즘 아이들은 경제가 불황이라는 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듣는 것 같다. 90년대 정도에 세계 경제가 활황일 때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경제 상태에서 미래를 찾아야 하는 청춘들을 볼 때마다 미안해지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 때 좋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불황 앞에서는 누구나 움추려든다. 좋은 사회 제도와 안전망을 갖추어 잘사는 나라라고 부러워하는 북유럽이라고 해도, 불황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직장을 찾으러 센터에 갔지만, 그 연세에 직장을 잡는 건 어렵겠다는 걸 직원은 돌려 돌려 말하지만, 40여년간 집구석에서 청소와 십자말 풀이에 온 인생을 바쳐온 꽉 막힌 브릿마리에게 무슨 말이든 통할 리가 없다. 눈치도 없고 자기 멋대로인 구석이 있어야 일이 풀리는 경우가 있다. 거절의 완곡한 표현으로 다음에 연락드리겠다고 하는 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끈덕지게 쫓아다니며 밥까지 해주며 얻은 직장이 보르그라는 쇠퇴해가는 마을의 언제 문닫을지 모르는 레크레이션 센터 관리인이다. 


마을의 집들마다 매물 표지판이 내걸려져 있고 시와 구청에서 운영하던 거의 모든 시설들이 철거되고, 주민들의 편의시설이라고는 브릿마리가 관리하게 될 레크레이션 센터와 상점 하나가 전부인데, 이 상점은 구멍가게와 우체국과 커피숍과 피자집과 자동차 수리점까지 겸하고 있으며, 주인은 휠체어를 탄다. 까칠하기 짝이 없고 꽉 막혔지만, 하루 하루 보르그의 사람들과 레크레이션 센터 주차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남아있는 보르그 사람들과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며 브릿마리는 서서히 새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줍고 친절한 마을 경찰관인 스벤과 썸을 타는 중 갑자기 나타난 남편은 브릿마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조금씩 알아가는 사람과 이미 모든 것을 알아 더이상 알 필요가 없이 친숙한 사람 사이에서 그녀가 켄트에게 갖는 익숙함과 편안함 그리고 스벤에 대한 미안함과 애잔함이 마음아팠다. 구청에서 아파트 부지로 내놓아 빼앗긴 축구장 대신 레크레이션 센터 앞의 주차장에서 축구를 하는 동네 아이들과 온갖 일들을 겪게 되고, 결국 선택 앞에서 흔들리게 되는 브릿마리. 60세에 다시 만난 보르그 사람들과의 작은 인연은 브릿마리에게 어떤 선택을 가져다줄까. 


참으로 푸근하고 따뜻한 소설이었다. 저자 프레드릭 베크만은 아직 30대로 아직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노년을 사랑스럽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세 개의 소설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은 문체가 간결하고,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감정을 과잉되게 표현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또한 크게 드러내지 않는 문체였지만, 몇 번이나 울컥하곤 했다. 브릿마리를 포함해서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소외된 계층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맹인이거나, 부모가 없거나, 휠체어에 의지함에도 불구하고 전투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그 해학과 유머가 참으로 긴 여운으로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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