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포루스 과학사 -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인문학 1
정인경 지음, 강응천 기획 / 다산에듀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그리스 사상을  계승한  서구 세력이 최근 몇세기에 이르러 승자로서 결국  스스로 세계사의 주인공의 면류관을 쓰게 된 역사의 이면을 역사의 패자로서 혹은 좋은말로 후발주자로서 바라다보는 입장은 썩 편하지가 않다. 왜 그렇게 되었나. 로마 몰락 후 코페르니쿠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니 나타난 후까지도 유럽이 기독교 사상이 예술과 철학과 과학의 손발을 꽁꽁묶어 암흑같던 14C 가량까지만 해도, 아라비아 중국 이슬람 문화권은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과학혁명은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화약과, 종이와 나침반과 같은 인류 문명에 획을 그을 과학문명을 가지고 있던 중국이나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과 십진법과 대수학을 일으키고 고대 그리스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있던 이슬람과 인도 문화권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물음은 한마디로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 흠뻑 절은 우매한 질문이다. 이런 의문을 가진 서양인이 조지프 니덤(1900~1995)이었다. 중국의 문명을 연구한 그는 14세기 이전의 중국의 과학기술에 매료되어 유럽인들의 지적 자만심이 비유럽 문명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으며 세계사를 유럽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에 대해 비판하며, 왜  과학혁명이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유럽에서만 일어났을까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은 수십년동안 논쟁을 일으켜왔다. 결론은 질문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다. 어느 집에 불이 나면 왜 불이 났는지를 질문할 수 있겠지만 불이나지 않은 집에 불이 왜 안났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불이 나는 것이 정상이라는 잘못된 세계관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 집에서 유독 어쩌다가 불이났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있고, 불이 나지 않은 다른 모든 집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유럽중심의 세계사, 문명사, 과학사 등등에 대해 크게 할 말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중국에서 천문학이 그리 발달해서 혼천의와 같은 뛰어난 관측기구가 고대부터 존재했으면 뭘하겠으며 유럽에서는 존재조차도 부정되었던 초신성에 대한 기록을 가졌으면 뭘할 것인가. 거기서 이끌어낸 생각은 천자의 통치 이념일 뿐 그걸로 날씨라도 예측할 수 있었나, 결론적으로 현재 관점으로 볼 때는 한마디로 괜한 삽질이었는데 말이다. 


다산에듀의 <보스포루스 과학사>에는 '동서양을 넘나드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보스포루스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륙 사이를 흐르는 터키의 해협으로, 고대로부터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풍요롭게 했다. 과학사에서 유럽 이외의 위치는 어떻게 될까.  책의 분량이 말해주는 결론은 초라할 뿐이다. 전체 400여페이지 중 유럽 이외의 부분에 대해 기술된 부분은 약 60쪽 정도에 불과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유럽이 암흑기였던 14C 이전까지의 과학 기술까지만 찬란했고 그 이후에는 예수회에서 보낸 유럽의 과학기술을 중국이 받아들여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계사의 관점에서 중국의 과학기술이 갖는 위치가 한 때의 영광 뿐인 이유를 꼭 유럽중심의 가치관이라는 비판적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책의 몇 가지 특징들을 열거해보면 이렇다. 첫째, 평소 궁금했던 과학사의 핵심 지식들을 포괄적으로 대부분 다루고 있다. 시대순으로 배열된 세계사의 지식들인만큼 까마득한 옛날 학교에서 배운 것도 있고 안배운 것도 있고, 다른 과학책이나 세계사 인문서에서도 많이 접했던 내용도 있고, 처음 보는 내용도 있지만, 과학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건들과 이야기를 하나씩 다루어가면서 이야기의 과학적 디테일들을 생략하지 않고 쉬운 말로 잘 풀어서 설명한 것이라서 재미있게 읽힌다.  


같은 맥락에서 두번째 특징으로 본다면 친절한 그림과 도표 사진 같은 시각자료들이 적재 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본문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시각적 보충자료가 필요하겠다 싶은 부분이 나오면 관련 그림들이 있다. 이 건 매우 중요하다. 말로만 한페이지 줄구장창 아무리 잘 설명해 놓아도 그림이 없으면 개념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음을 모두다 알고 있다. 그림을 안그리는 이유는 귀찮아서일거다. 그림을 적재적소에 넣어놓는 것은 독자에 대한 배려다. 


우리에겐 지식의 단편적 습득이 아닌 지식의 결합이 필요하다. 장하성의 <과학 철학과 만나다>에서는 과학사에 있어 토마스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설명하면서, 그 패러다임 변화를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 정인경님은 직접적으로 그런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사에서 하나하나 이루어간 과학적 혁명을 전체적인 진보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과학사의 패러다임 변화를 상세하고 세밀한 과학사의 개요와 함께 읽으면 더 입체적인 세계관을 갖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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