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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글라스 ㅣ 아티초크 픽션 1
얄마르 쇠데르베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1월
평점 :
정처없이 배회하며 스치는 바람처럼 머리 속은 온갖 상념들로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하지만, 그것을 온전하게 기록하기는 어렵다. 그 스치는 생각 한 자락에서 단어 하나만 건져내도 뭔가 대단한 정신적인 걸 이룬 것 같은 건, 백일몽은 그야말로 꿈처럼 스르륵 기억과 흔적들로부터 완전하게 떠나가기 때문이다. 얄마르 쇠데르베리는 이렇게 머리속을 드나드는 떠돌이 생각들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닥터 글라스의 일기장에 잘 포착하였다. 독자는 스스로를 잊고 글라스의 머리속 상념을 따라 이리저리 시대의 벽을 넘어 현재 내게도 유효할 번뇌와 사색속을 거닌다.
얄마르 쇠데르베리는 19세기 스웨덴 작가이다. 북유럽 고전문학은 어쩐지 좀 생소한듯 한데, 고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깔끔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속에서 작가가 사고하는 방식과 독자에게 질문하는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죄와벌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지만 작가의 독백이 심각하다기 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다가왔다. 본문에 언급된 스톡홀름 시의 거리와 예술작품들을 담은 작은 흑백 사진들을 삽화처럼 싣고 있어서 읽는 내내 배경에 대한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마음에 들었던 건 작품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두서없이 스치는 머리속의 생각들을 점점이 이어서 충격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글의 형식이었다.
글라스의 일기는 6월 12일에 시작해서 뜨거운 여름을 다 보내고 깊은 가을 속, 더 깊고 어두운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가기 전 10월 7일에서 끝난다. 일기는 독신으로 혼자사는 글라스의 똑같이 되풀이되는 매일의 일과지만, 그 똑같은 의사의 일상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들,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가 하는 행동들은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안과 겉이 다른 사람이라면 위선적이고 사악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글라스의 일기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한 사람의 내면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의사로서 지역 사회의 존경을 받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일구고 있지만, 그의 머리속은 이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적 관습과 규범에 저항한다. 때문에 그의 일기장은 투덜투덜,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들, 다르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행동들, 극복하지 못한 좌절과 상처들로 채워진다.
순간처럼 짧았던 사랑의 비극적 종말. 그것 때문이었을까. 그가 목사 부인에게 품는 감정은 지금 낯설다. 정신적 사랑만으로도 충만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사랑과도 다르다. 그는 목사부인이 그녀의 남편인 늙은 목사에게서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부간에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생각은 19세기에도 유효했을까. 동의하지 않는 섹스는 폭력이 동반할 수밖에 었으므로, 성폭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뭐 이런 개념도 아니다. 젊은 아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 친구에게 성적 욕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는, 그 죄책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늙은 목사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과 나이의 편차에서 생기는 성적 욕망과 애정의 조건을 외도로 채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인생인가.
그런데 그것과는 별도로 글라스는 그레고리우스 목사를 싫어한다. 그가 목사를 싫어하는 피상적 이유는 그의 외모다. 그의 백일몽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젊고 예쁜 부인과 함께 사는 것이 부인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그의 외모에 대한 집착적 혐오로 바뀌는 것 같다. 소설의 초반, 검진을 끝내고 산책을 나갔다가 매일 만나는 지겨운 늙은 목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주치지 않기 위해 다리 난간에 기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목사가 그를 알아채고 옆에 다가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젊고 예쁜 아내를 괴롭힐 것이 뻔한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목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못생겼다. 아내가 젊고 예쁘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이 둘은 죽이고 싶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젊은 아내가 찾아와서 자신이 외도중이라 목사와 섹스를 하기 싫은데, 자꾸 섹스를 하려고 해서 미치겠다는 말을 듣자, 그를 죽이고 싶은 피상적인 욕망을 더욱 구체화시키기 시작한다. 물론 백일몽 속의 일이다.
막연한 상상을 구체화한 상상으로 디테일을 구현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그에 대한 혐오심을 심적으로 조절하는 수단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 예전에 남편이랑 싸우던 날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차가 주차된 걸 보자, 영화 <봄날은 가다>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 반짝반짝 윤나는 남편의 차를 스윽 긁고 가는 상상을 하자, 약간의 죄책감이 증오감을 희석시켜주었었다. 의사는 그레고리우스와 싸운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악감정도 없으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근거없는 분노를 희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코믹하게 느껴졌던 그 때문이었다. 누구나 상상 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별도로 의사의 일기를 통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논란이 될만한 생각이 다루어진다. 안락사와 낙태 등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의사의 머리속에만 있다. 그의 환자들이 울며 불며 선생님 살려주세요 라고 늘어질 때 사실은 죽여달라는 소리다. 뱃속의 아기를 죽여달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의사로서의 사명과 임무, 책임 등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도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 속으로는 수없이 논쟁한다. 의사로서 주어진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의무,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 뱃속의 아이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고객들과 의사로서 뱃속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감, 이러한 상반적 상황은 . 하지만 그는 준비된 똑같은 멘트로 그런 부탁들을 거절하고, 일기장에 그 일에 대해 혼자서 논쟁한다. 그리고 후에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고객들을 보면서 또다시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간다.
그런데 그리고리우스 부인에게만은 예외다. 그의 글 속에서 드러난 그의 신중한 성격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가 늙고 추한 목사와 엮여, 밤마다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섹스를 해야 하는 일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는 실제로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남자에게 느낀 관능적 사랑에 대한 종교적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청춘이 선물한 푸르른 사랑을 저버리고 늙은 목사에게 아무렇게나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회개하듯 바쳤다. 그레고리우스가 생각하기에 그 잘못된 선택의 근원은 아무 죄도 없는 인간에게 죄책감을 심어준 종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더렵'히고 마음을 '더럽'히게 될 지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죄책감은 탐욕스런 늙은 목사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걸로 '용서'되는 건가.
의사 글라스가 모순적인 관습과 규율 때문에 비롯된 한 여자의 불행한 인생을 바로잡고 싶어한 것은 그녀를 향한 정신적인 사랑인 것 같지만, 일기장에는 그렇게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닥터 글라스 자신의 불행한 과거와 엮여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풋풋한 첫사랑을 잃었다는 공통점, 그가 이제껏 혼자인 이유일 지도 모를 상실 저편에서 목사 부인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위안을 얻으려는 갈망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목사가 죽는다고 해서 그 여자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 부럽도록 잘생긴 레케와 목사 부인을 위해 남몰래 살인을 계획한다. 사랑하지만, 자신과는 말고 그녀가 원하는 남자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헌신적인 사랑인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닌 것도 같고. 애초에 목사 부인에 대한 어떤 연정도 있지 않은 것도 같다.
뒤편 설명에 최근 읽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와 문체 면에서는 비슷한데도 없지만 알 수 없는, 일 길이 없는 인간의 심리 라는 측면에서 공감한다. 하지만 또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사의 회전>과 다르다. 사랑은 반드시 육체적이어야 하느냐라는 진부한 질문을 던질 게 아니라, 의사가 왜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그레고리우스를 죽이고 싶어했는지, 의사가 젊은 목사 부인을 위해서 했던 행동은 (당연히 잘못된 거지만)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거 같다.
애초에 왜 사랑은 죄책감을 동반해야 했을까. 때로 그 동반으로 인해 '그리고'로 이어지는 숙명적 불행은 수많은 불행을 낳은 '그리고'를 설명한다.
놀랍다. 19세기에 이런 소설이 나왔었다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