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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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만물에 깃든 영혼과 그것을 움직이는 신들의 힘과 신이 부여한 운명을 믿었다. 트로이아인들의 운명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에르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향해 황금사과를 던지던 순간,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이렇게 가장 아름다운 세 명의 신들이 서로 각자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범위 내의 것들로 한정지어진다. 헤라가 아름다운 여인 대신 아시아의 통치권을 약속한 것도, 아프로디테가 전쟁에서의 승리 대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한 것도, 아테나가 아름다운 여인 대신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한 것도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멍청한 파리스에게 그런 걸 고르라고 한 여신들도 멍청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파리스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탐욕이 불러올 역사적 비극을 알지 못했다. 선택받지 못한 두 여신 헬라와 아테네의 힘은 막강하다. 


일리아스가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실제로 800쪽 짜리 이 두꺼운 서사시의 내용은 트로이아 전쟁의 막바지 약 50일 정도 되는 시간을 다룬다. 그 전까지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겠지만, 일리아스의 시작과 함께 전개되는 마지막 전투의 양상은 신들의 개입과, 신들의 편갈림, 그리고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불화로 인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신들은 패가 갈렸다. 트로이아인의 편에는 아프로디테와 태양의 신 아폴론,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있고, 그리스 연합군 편에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 전쟁의 신 아테나, 그리고 포세이돈과 테티스 등이 있다.


전쟁은 신들에 의해 이미 결정된 운명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그 과정에서 신들 역시 전쟁의 일부가 된다. 분노하고 질투하고 계략을 꾸미고 편을 가르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본성을 가진 신들이다. 하지만 누가 주인공인가, 그들의 존재 의미는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는 데 있다. 인간들이 자신을 숭배하고 재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려야 그들의 삶은 의미가 생긴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관심이 있고 구복이라는 불손한 목적으로 신을 숭배하는 것과는 달리 신들에게 인간은 자신들의 힘으로 조정가능한 세계이면서 신들의 세계를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리아스 서사시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지만, 트로이아 전쟁의 발단은 왕의 아내를 납치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로디테가 약속한 '가장 아름다운 여자'란 다름아닌 남의 아내였는데, 간덩이가 부은 파리스는 좋다고 여신의 계획대로 헬레네를 납치해냈던 것이다. 거대 서사시의 전개 역시 '아름다운 여성'이 발단이 된다. 가장 용맹하고 위대한 전사인 아킬레우스의 여자를 아가멤논이 데려가 버리자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간의 갈등이 연합군을 분열시킨 것이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온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함선에 틀어박힌다.


연합군의 수장인 아가멤논은 트로이아에서 노획한 크리세이스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아폴론의 사제인 크리세이스의 아버지가 몸값을 지불하고 딸을 데려갈 수 있도록 부탁한다. 아가멤논이 크리세이스를 내어주길 거부하자, 아폴론은 그를 위해 그리스 연합군에게 흑사병을 내린다. 회의 끝에 소녀를 돌려주기로 결정되자 아가멤논은 길길이 날뛰며 왜 자기 것만 빼앗겨야 하느냐 그럼 니꺼라도 내놔라 하면서 아킬레우스가 데리고 있던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간다.


소녀 브리세이스는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 아가멤논이 빼앗긴 크리세이스 역시 전리품이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전쟁의 댓가로 선물로 받은 이 여인들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이 아니라,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전리품을 사이에 두고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 관심이 많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혁혁한 전공으로 인해 수많은 전리품을 아가멤논에게 안기고, 그 전공의 하나로 자신이 직접 노획했으며 선물받은 그 소녀를 빼앗긴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비애감을 느낀다. 더욱이 아킬레우스는 한 때 제우스의 아내가 될 뻔 했던 여신 테티스의 아들로 신의 아들이라는 대단한 가문을 등에 엎고 있으면서도 필멸하는 인간의 씨를 받아 태어났고, 그뿐만 아니라 명이 짧은 운명을 가졌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슬퍼하는 아들을 위해 제우스에게 아들의 명예를 복구시켜달라고 호소하고, 제우스는 아가멤논을 벌주기로 작정을 하고, 트로이아의 편에 선다. 즉, 제우스의 계획은 아킬레우스가 빠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엄청난 피값을 치르고 트로이아에게 쫓겨 아킬레우스에게 빌며 제발 전쟁을 도와달라고 호소하게 되기를 원한 것이다. 어마무시한 힘을 얻은 헥토르를 선두로 트로이아 군은 벌판으로 나와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전세는 점점 트로이아 편으로 흐른다.


그 과정에서 트로이아를 증오하는 헤라와 아테나를 비롯한 그리스 편에 선 신들은 제우스를 속여가며, 전쟁에 가담하여 제우스의 계획을 방해한다. 때로 용기를 불어넣고 때로 안개와 어둠 등의 힘으로 때로 물리적인 힘을 이용하여, 또 때로는 사람의 모습을 빌어 직접 행동을 지시하면서 신들이 인간의 전쟁에 깊숙히 개입되면서, 트로이아 진영의 신들 역시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거듦으로써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동이 속으로 마구 흐른다. 화가 난 제우스는 이렇게 신들의 개입에 제동을 걸어 금지시키지만, 그를 속이려는 헤라의 계략이 판치고 조절 불가능해지자, 마침내 더이상 개입했다가는 엄벌을 처한다는 제우스의 강한 명령을 듣고서야 한쪽으로 물러선다.


헥토르의 지휘를 받은 트로이아인들이 그리스 대군을 모두 물리치고 가장 강력한 장군들인 아가멤논, 디오메데스, 오디스에게까지 부상을 입히고 함선 정박지까지 몰아가 결국 함선에 불을 붙이는 상황에 까지 이른다. 이 꼴을 본 아킬레우스의 전우(혹은 애인?),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를 설득하여 자신이 직접 그의 무장을 빌려 입고 트로이아군을 물리치지만, 결국 헥토르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를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오열하며, 전쟁에 가담한다.


인간이 인간대로 창으로 찌르고 돌로 치고 칼로 베는 참혹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들 역시 자신이 편들고 있는 쪽을 위해 온갖 계략과 술수를 마다하지 않는다. 헤라가 제우스를 유혹하여 동침한 후 잠의 신과 짜고 잠들게 하여 그 틈에 제우스와 서열상으로는 동급인 포세이돈을 끌어들이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후에 제우스는 이 일을 알고 불호령을 내리는 것이 한 예이다. 이렇게 신들에 의해 결정되는 인간의 결정은 서사히가 시작되기 전 세 여신의 질투와 경쟁에서부터 이미 그 시작의 기반을 두고 있다.


필멸의 인간과 불멸의 신들, 불멸의 신들은 멀하지 않는 자신들에게 전쟁이 어떤 의미도 주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힘의 균형을 찾기 위해, 필멸의 인간을 이용한다. 인간들은 신들에 의해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전쟁 역시 신들의 뜻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또한 의지하고 있다.


일리아스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자, 유럽인들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원점이다, 서구의 문학이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저자로 알려져 있는 호메로스는 실제로 '호메로스'라는 이름으로 실존했던 인물인지 여러 명의 작가들의 합작품인지 혹은 노래하는 음유시인의 시를 누군가 옮겨적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고대에는 그가 기원전 8세기 경에 실존했었다고 믿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오늘날 여러 문학의 형태로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의 원형이 당대의 인간의 이야기들이 신들의 이야기와 섞여져서 존재하고 있으며, 당대의 사람들이 신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식속에는, 그리스 신화속의 여러 신들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운명마저도 이미 신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정해져 있다는 사실마저도 한치의 저항도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증명하느냐 증명할 수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일상과 행동, 그리고 의식의 저변에 신들의 존재가 함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들을 믿지 않지만, 과거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누적된 시간의 끝에서 오늘이 있으며,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 한 오늘도 내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때 있었던 것이 지금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지금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는 그 모든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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