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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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하고, 물방울처럼 홀로 고립된 존재인 것 같은 고단한 저녁,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다. 날숨과 들숨을 통해 공기를 떠다니는 작은 원자들을 공유하는 그 곳에서 몸을 눕히면 살이 만져지는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들이 웬수처럼 으르렁거리던 사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지치고 힘겨울 때 상처받은 영혼을 끌고 돌아갈 곳이, 아파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고 저녁을 함께 먹을 사람도 없는 반지하 월세방이 아니라는 사실은 얼마나 이기적인 위안인가.


고독과 소외에 단짝처럼 동반하는 친구가 궁핍이다. 결핍은 자주 궁핍에서 비롯된다. 집이 없는 이유, 돌아갈 곳이 없는 까닭은, 실패가 낭패감과 절망 같은 정신적 고통만을 야기해서가 아니다. 최소한의 정신적 만족을 누리기 위한 물리적 환경을 지배하는 가난을 함께 부르기 때문이다. 마마가 아몬드나무 하우스에 불러들인 상처받은 영혼들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산산조각 깨어질 것처럼 위태롭고 연약하다. 마마가 사람들을 아몬드나무 하우스로 부르는 까닭은 자신 역시 그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족도 없이 홀로 늙어가는 노인이지만 그녀에게는 연립주택이 있다. 어두운 시대 그리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방법으로 긁어 모아 두었던 두둑한 돈도 있다. 북카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절망을 가슴에 끼고 떠도는 도시 난민들을 불러모아 제공하는 아몬드나무 하우스가 그녀에게 제공하는 것 역시 그들에게 주는 것 못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마마 역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조카 앞에 털어 놓아야 하는 한많은 사연이 있다. 난파선처럼 출렁이던 한국 현대사를 요리조리 통과하며 약삭빠르게 마마가 누린 것들은 그로 인해 잃은 것들을 상쇄할 수 없다. 가혹한 시대가 야기한 타인들의 개인적 불행을 안아주기로 한 마마의 행동은 죽을 날을 앞둔 마마의, 삶에 대한 회한이기도 하다. 


배우의 전라 연기로 획기적인 작품 연출을 갈망하던 명우는 자극적 연출 효과로 관객은 확보할 수는 있었지만, 명성에 치명적인 금을 그었고, 수익 역시 보잘것 없었다. 여배우로서 잘 나가는 듯해 보이던 여자친구가 이별 선고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건은 엎친데 덮친 격이다. 치명적 실패작으로 인해 직업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까지 잃게 된 명우는 절망을 술에 의지한 채 폐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던 중, 마마의 눈에 띄어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북카페를 맡아 하게 된다. 시큰둥하게 받아들인 명우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제각각 각자의 상처와 결핍을 끌어안고 따로따로 살아가고 있는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입주자들은 조금씩 그에게 보이지 않는 곁을 내어준다. 마마가 떠난 후에도 그들의 말을 들어줄 유일한 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빈곤, 가정폭력, 상실,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강간피해 등의 피해자들이며 동시에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걸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결핍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마마의 조카는 반대로 불안정하고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세상을 조소한다. 


아몬드나무 하우스에서 북카페의 책임을 맡은 명우는 술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카페의 책임이라는 임무를 통해 서서히 사회성을 회복되어간다. 하지만 그를 변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몬드나무 하우스 입주자들이다. 명우 자신도 커다란 절망과 상처, 그리고 결핍과 소외를 짊어진 피곤하고 지친 현대인이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마마가 차려주는 식사상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식사를 하는 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더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느낌이다. 소설이 빠르고 잘 읽히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것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미약해보이는 화자로서, 그리고 어떤 해결자로서의 명우의 역할이 존재한다. 말을 잃은 아이 윤태는 명우를 따라 나서고 말없이 시작된 걷기는 두 사람의 마음이 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함을 보여준다. 윤태의 비행을 알고, 그의 불행까지 알고 있는 명우는 말을 잃은 아이에게 아무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길상사를 거쳐 도시의 산책을 계속한다. 그 말없는 동행 속에서 이제껏 꽁꽁 싸매두고 혼자서만 감당해왔던 그 터질 듯한 감정이 울음으로 폭발될 때, 휴 하고 작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마마의 죽음 전에 밝혀져야 했던 소설의 큰 축이었던, 충격적 출생의 비밀도 명우의 개입으로 밝혀진다. 


어쩌면 이 소설은 연출가 명우의 성장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입주자들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명우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자기 앞에 떨어진 불등보다 더욱 절박한 사연들을 끌어안고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채 말을 잃은 고독한 청춘들을 위해 그닥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음에도 자신이 그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단지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깨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삶이 덜 불안한 궤도로 방향을 틀 수 있다. 그리 적극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명우의 작은 노력은 이들을 어렵게 이어주던 마마의 죽음이 가져올 뿔뿔이 흩어져 각자 돌아설 도시 난민의 길을 회피하고 다시 서로에게 의지가 되게 한다. 하지만 풀리지 않던 의문 '그녀가 나를 왜 떠났을까'에 대한 잔인한 대답이 감당해야 할 몫은 여전히 명우의 몫이다. 그럴까. 내민 손을 잡으려 주저주저하던 윤정을 떠나 지나간 옛사랑의 의문을 풀던 시간동안 윤정을 어지럽히던 타인과 타인과의 틈, 그리고 간격.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따로 따로 같이 있는 사람들을 품은 도시 풍경은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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