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에 고백할게 하나 있는데, 다름아닌 밤마다 잠자기 전 유튜브나 커뮤니티에서 찾아보는 영상/사진이 있다는 거다. 그건 야동이 아니라 고양이와 개, 그리고 아기들이다. 고것들을 담은 영상과 사진은 하루종일 뭔가를 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준다. 그렇다고 내가 현실에서 동물을 좋아하거나 빽빽 우는 아기를 막 좋아라 하는 편이 아니다. 엘리베이터나 버스 같은데서 아기가 타고 있으면 꼬물거리는 작디 작은 손가락도 만져보고 싶지만 그냥 들이다보고 만다(남의 아기를 더러운 손으로 함부로 만지면 안돼요). 개들은 누가 안고 있거나 데리고 다니면 쳐다도 안보지만 교외 카페나 절 혹은 교외 사는 지인 집 같은데 가면 유독 꼬리를 살란살랑 흔들며 놀자고 애교를 떠는 개들을 가끔 보는데 가까이 다가오면 살짝 겁나고 만지면 뭉클한 촉감과 낯선 털의 감촉 때문에 피하지만 무슨 생각할까 신기한 생각이 들어 사진 찍어두고 연구한다. 고양이는 아이가 어릴 때 늘 아파트 화단을 뒤지며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놀기에 길고양이들에게 뭔가 친근함을 느껐지만, 토끼 한마리를 키우다 한달 만에 죽은 후로 집에서 애완동물을 키울 생각은 버렸다.

사실 아파트 쓰레기 버리는 곳에 가면 늘 고양이들은 볼 수가 있다. 누군가는 밥을 주는 것 같고 누군가는 또 싫어하는 것 같고 , 경비님들도 여러 분이 계신데 어떤분은 싫어하시고 어떤 분은 열심히 밥 챙겨 주시고 하는 것 같다. 나로 말하자면 쓰레기버리러 가거나 집을 나설때 한번씩 만나고,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안녕 하고 말걸어보지만 도무지 그 고양이가 날 아는지 어쩌는지는 알 길이 없는 사이다. 밥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날 쳐다보긴 하는데 몹시 경계하고 내가 다가가면 달아나버리기 때문에 그냥 멀뚱히 말만 붙여보고 대답도 못듣고 돌아선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 사라에게도 여러 불행이 한꺼번에 왔다. 2천년대 초반 닷컴 붕괴와 더불어 대형회사에 병합된 후 탐욕적 대기업의 이미지 세탁용 디자인을 의뢰받았지만 애써 준비한 발표 자료를 포함해 모든 작업 내용이 담겨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지하철에 두고 내려 발표장에서 빈 손으로 아무 것도 없는 하얀 칠판 앞에 섰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매몰되고 권태 속에 빠진 동거 생활도 지쳐 우울증을 보이던 사라는 발표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짧지만 병가를 얻을 수 있게 된 사라에게 길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난다. 냄새를 맡으라는 고양이의 충고에 동거남의 냄새를 맡으니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인간이 짝을 이루며 평생 한 사람과만 사랑을 하도록 문명을 가꿔왔지만, 그래서 일부다처, 일처다부 등의 관습이 많은 문화권에서 야만이지만, 사랑은 영원하지 못하고 인간의 마음은 간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매일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늘 조금씩 변해가고 엤기 때문에 한 번 사랑했다고 영원히 둘만 서로 사랑해야 하는 건 아무리 합리적인 인간이라지만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결혼 십년차 정도가 되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둘이 계속 살아가는 건 둘이 함께 공유해온 것들 ,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공유하게 될 것들 때문이다. 둘이 함께 유전자를 섞어 만든 아이들, 집, 함께 먹는 밥상, 함께 보는 티브이, 소파 부엌가구들, 집, 저축, 빚, 함께 아는 친구들..사랑이 식어도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니것 내것 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나마 물건이라면 돈만 엤으면 새로 사면 되는 거지만 아이는 어쩔거며, 둘이 함께 영원히 같이 살게 될 거로 생각하고 헌신한 시간들, 함께 만들어온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상호 의존 관계 모두를 고려한다면 헤어지는 일이 그냥 그렇게 엉망인 채로 사는 편에 비해 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사라는 아이가 없었고 집도 남친의 부모님이 투자목적으로 구입한 집이었고, 무엇보다도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파트너의 외도가 엄청난 충격과 절망적 샅황을 만들었지만 질척거릴 필요 없이 비교적 빠르고 덜 고통스럽게 헤어진다 부자 동네서 살다가 월 500파운드의 월세를 찾으려니 대낮을 걷기에도 위험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빈민가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아빠와 남동생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배신감으로 몸을 떨며 우울증에 날마다 울며 지내는 사라에게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이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긍정의 심리학을 연구하고 컨설팅하는 학자인데, 이 책은 소설이지만 자기계발서적인 성격을 가졌는데, 이렇게 진퇴양난에 빠진 사라에게 나타나 이제까지의 자신은 템즈강 속에 빠뜨려 죽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조언해주는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며 사라가 천천히 우울의 밑바닥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멘토이자 친구가 된다.

인간은 어떤 상태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태어났다. 당장 없으면 죽을 거 같은 연인, 고르고 골라 아껴 두었던 가방과 신발과 예쁜 옷들, 아빠가 평생 모은 장서들, 이런 것들은 갑작스런 상태의 변화에 따라 모두 처분하거나 보내버려야 하는 것들이다. 한 때 모든 것일만큼 소중했던 것들을 버리려면 길고 어두운 고통 속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도 믿었던 연인에 대한 배신 때문이라면 고통은 치욕이 된다. 사라의 변신은 고양이 관점에서 본 인간의 탐구가 직접적으로 사라에게 충고와 조언으로 시작된다. 당연한 걸로 알던 탐욕스레 육식을 먹으면서 고양이가 새를 물어오자 끔찍해 하던 사라는 고양이에게 설득되어 채식주의를 실천해보고 그 풍성하고 오묘한 맛의 세계를 날게 된다.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다니던 일상에 걷기와 자전거타기로 생확 패턴이 바뀐다.

내가 지굼 가진 것 중 무엇이 소중할까? 그것은 사실 그렇게 소중한 걸까? 만일 그게 없다면 어떨까. 소석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혹시 지금 가장 소중한 것 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 건 아닐까? 소설이라기 보다는 인생의 실패를 만났을 때 고양이에게서 배우는 지혜라고 할 수 있을만큼 자기계발서적 성격이 강한데, 고양이가 하는 충고와 설명 , 사라의 투덜거림이 조금 조금 장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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