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 어떤 애도와 싸움의 기록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획.채록 / 나무연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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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은 여성이다.  나머지 세상의 절반은 남성이다. 차이를 인정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과제, 평등을 말하기 이전에 이미 확립되어야 했을 것들의 부재속에서 쌓아올려진 여성해방이라는 허상은 밤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칼에 맞아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두 성간의 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확고한 성벽 속에서 남성이 안전하게 몸을 펴고 활보하는 동안, 성벽 밖의 여성은 익명의 남성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또 다른 남성을 필요로 한다. 데이트를 끝내고 여친을 바래다주는 문화가 서구에서도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이시대의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밤에 화장실을 혼자가는 일이 불안한 이 사회에서 , 저 포스트잇들을 붙이기 위해 얼굴을 마스크로 가려야 하는 세상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어쩐지 사치처럼 느껴진다. 

천사 개의 포스트잇은 보존을 위해 잘 옮겨졌고,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북은 공짜다(메갈이니 어쩌니 해서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공짜인 이북을 소개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이 사건을 바라보며 느꼈던 이 땅의 모든 여성들 개개인의 목소리다. 


시스템 속에서 이득을 취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등을 돌리고 스스로 속인 것 역시 분명한 잘못입니다. 저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 바꾸기 위해 이제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겠습니다. 슬프고 화가 납니다. 부디 고인의 명복을

923 여성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호받지 않아도 누군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정신분열증 때문이라고 합리화하지 마세요. 제 동생은 정신분열증 환자이자 페미니스트입니다.

피의자는 정신분열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언론들은 여성 혐오가 아닌 개인의 범죄라고 보도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성에게 무시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요? Misogyny가 만연한 우리 사회가 아닌가요?

892 여성 혐오 범죄=열등 범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여성에게 화풀이하지 마세요.

만나주지 않는다고 폭행당하고, 헤어지자 했다고 염산 테러를 당하고, 여성이란 이유로 살해를 당하는 나라. 이런 이유는 어느 나라에서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딸을 ‘단속’하지 말고 아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여성 혐오,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이주민 혐오. 온갖 혐오를 낳는 사회구조에 맞서 새날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고 싶지 않다는 게 왜 남혐인가요.

나는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보상품이 아닙니다. 마구 대하고 죽여도 되는 존재도 아닙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화장실을 같이 가달라는 게 아닙니다. 혼자 가도 안전하고 싶다고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뿌리를 뽑아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추모 공간 보존할 예산으로 공공 화장실이나 설치하려는 발상이야말로 여성들과 소수자들을 사회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는

남자에게 보호받고 싶지 않습니다. 남자 없이도 안전하고 싶을 뿐이에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잠재적 가해자라서 듣기 싫은가요. 나는 ‘잠재적 피해자’라서 무섭습니다.


오래 전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 기숙사의 한 친구에게 짝사랑하게 된 동향 출신의 선배가 생겼다. 동향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볼 기회가 있었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늘 선배 얘기 뿐이었다. 스무살 청춘을 흔들어 놓았던 그 선배의 나이 역시 스무살 청춘. 선량하고 푸른 청춘이었다. 그 선배가 친구가 좋아하는 걸 눈치채고 하숙하던 집으로 불렀던 날, 그 친구는 울면서 돌아왔다. 매일매일 꿈꾸던 그 멋있던 선배와의 첫 데이트는 선배의 강간 미수로 끝났다. 강하게 저지하는 친구의 청바지를 거의 반을 완력으로 벗겨냈다. 저항을 하는 데 어떻게 바지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벗기고 그 빡빡한 청바지를 내릴 수가 있지? 나는 순박한 그녀를 의심했을까.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앎의 한계로는 무언의 동의가 있지 않은 이상 옷을 벗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아직까지 떠나질 않는다. 힘이 너무너무 센거야.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바지를 벗기고, 아무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힘이 너무너무 세서 꼼짝할 수가 없었어. 그렇다. 그들은 힘이 세다는 것이 나에게 평생 각인된 첫 이성의 차이에 대한 배움이었다.  힘이 너무 세다는 것. 막판에 어떤 순간이 왔을 때, 힘으로는 절대로 남자를 당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멋있는 남자라 하더라도 그의 욕망이 시키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힘으로 강간할 수도 있다는 교훈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뢰적 인간관계 형성을 취약하게 한다. 힘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세상 어디에서곤 만연되어 있다. 그리고 그 힘의 논리 앞에서 꼼짝 달싹할 수 없는 위치에 서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어른은 아이들보다 힘이 너무너무 세다. 남성은 여성보다 힘이 너무너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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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2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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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6 1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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