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앙투안 로랭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대통령의 모자가 가는 곳에 함께 따라다니는 것은 결국 행운이다. 첫번째 남자에게 모자는 자신감이었고, 두번째 여자에게는 결단이었고, 세번째 남자에게는 용기였다. 그리고 네번째 남자에게 모자는 혁신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말을 고르느라 헛수고를 했지만, 사실은 그게 그거다.  미테랑 대통령이 식당에서 두고 간 모자가 우연히 누군가에게로 오면 그 모자를 가진 사람의 인생에는 행운이 뒤따랐다. 다니엘이 그 모자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기차에 두고 내렸을 때는 저런 이걸 어째 싶어, 내 일처럼 안타까왔으나,  그런 식으로 모자가 돌고 돌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종류의 행운을 가져다 줄 거란 건 충분히 짐작할만 하다. 자주 물건을 잃어버리는 나지만, 내게 만일 이런 행운이 생긴다면, 잊어버리지 않을 텐데 말이다. 모자를 쓰게 되면, 나에겐 어떤 일이 생길까.


늘 동료에게 치이기만 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최신영화 케이블 채널 이용권도 없는 찌질남이 아내와 아들이 여행간 사이에 밥해먹기가 귀찮아 들른 곳이 값비싼 식당이었다.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못간 곳에는 나중에 돈이 있어도 그 젊은 시절 못갔던 시간들을 묘한 마음으로 뒤돌아보게 된다. 그 때 가지 못했던 곳은 지금 가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내도 없는데.. 그래도 다니엘은 저벅저벅 들어가서 물쓰듯 해산물 모둠 요리를 시키고 값비싼 와인을 시켰다.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 일행이 자신의 옆자리에 동석하는 걸 지켜본다. 이런 절묘한 우연에 다니엘은 가슴뛰는 경험을 했는데, 더욱 더 큰 행운은 대통령이 자신의 좌석 위에 두었던 모자를 챙겨가지 않은  그는 대통령의 모자를 쓰고, 모자 속의 무언가, 자신도 모르고 보이지도 않는 어떤 '나노입자'가 정신에 작용을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풍부한 영감과 생각과 아이디어와 유창함과 자신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그는 중요한 발표에 핵심을 찌르고 잘 발표해서 자신을 눌러 찍던 동료를 물리고 승진을 거듭한다. 머리카락에서 힘이 생기는 삼손처럼, 그는 모자에서 자신감과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사 그것을 기차에 두고내린 것이다. 


결혼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이름은 파니. 몰래 하는 사랑이 괴로워진 것은 어느 날 남자가, 사랑한다고, 아내와 이혼할 거라고 말하면서부터다. 가볍던 만남에 던진 감언이설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환상을 심고 이제 여자에게 남자는 더이상 가벼운 오락 거리가 아니다. 몇평짜리 작은 호텔방 이외의 공간에서는 서로를 만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로지 기댈 것은 남자의 결단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해. 그 시간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시간이 가져오게 될 결과를 왜 사람들의 눈을 속여, 밝은 대 함께 걸을 수도 없는 처지의 결혼한 남자에게서 예측하지 못했겠는가. 만남은 관성을 낳고, 그 관성 속에서 같은 속도로 반복되는 일상을 깨뜨릴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기차에서 주운 모자가 그 여자에게 씌어졌을 때, 소설가 지망가인 그 여자는 호텔방에서 바지벗고 기다리던 남자가 웬 모자냐, 누구 모자냐, 어떤 남자가 줬느냐고 하자, 즉석에서 소설을 만들어낸다. 섹스가 끝나면 타인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남자에게 질투할 수 없었던 여자는 모자의 존재로 인해 자신을 질투하는 남자에게 가상의 모자의 주인을 만들어낸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끝나는 거 쉽다. 그 길로 남자는 바지를 주워입고 냉정하게 호텔을 떠난다. 한 번도 붙잡지 않은 채로. 모자의 주인이 가상의 남자라는 말이 사실인지 한 번도 다시 묻지 않은 채로. 모자는 그녀에게, 결단을 주었다.


피에르는 8년째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우울증 상담을 받고 반폐인인 채로 살고 있는 조향사다. 절대 후각의 지존으로, 코로 들어오는 공기중에 포함된 단 하나의 분자까지 정확하게 감지하여 성분을 알아낸다. 공원 벤치에서 발견한 모자 덕에 그는 우울증에서 빠져나와 획기적인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낸다. 보수적 프랑스 귀족들과만 사교하며 화석처럼 변하지 않을 낡은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알며 살아가던 베르나르의 모자가 어느 식당에서 바뀌었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자신이 그 화석을 부수고 나와 살아있는 생명이 되고자 했다.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분명히 하고, 무엇을 지지하는지를 확실히 한다. 


그자들은 화석이야 영원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만을 바라며 오래된 아파트에서 예전과 똑같은 실내장식 안에 머물러 있는 화석들 185


그가 속한 세계는 더 이상 그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혹, 인생이 당신을 어디론가 인도하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갈림길로 들어서게 된다. 운명의 gps가 정해 준 경로를 따라가지 않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음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없다. 이를테면 우리 존재의 버뮤다 삼각지대는 신화이면서 동시에 현실인 것이다. 유일하게 확실한 한가지는 이 난기류 지역에 일단 들어서게 되면 당신은 절대로 원래 가려던 항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지옥은 바로 타인이라고 좌파의 거두 사르트르가 말했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 익숙한 바위에만 딱 달라 붙어 사는 홍합들처럼 자기들의 신념에만 매달리는 편협한 정신의 빈대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신봉해 왔던 원칙들이 그가 가하는 비판에 의해 하나씩 차례로 무너져 내리면서 그는 날개가 솟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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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2016-11-0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감, 결단, 용기 라고 이야기해 주신 부분.. 그리고 결국 모두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모자>라는 물성을 지닌 하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준 게 참 아이러니하죠. 인간은 스스로는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한 존재인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쉽게 읽히는 짧은 소설이었는데 뭔가 씁쓸하게 끝났던 기억이 납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CREBBP 2016-11-09 14:34   좋아요 0 | URL
짧은 단편 여러개를 모아놓은 것 같기도 했지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스토리이니까요. 모자 하나로 자신의 신념과 자신감과 결단과 용기를 물론 바꿀 수는 없겠지만, 편협한 자기 생각에만 갇혀서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지지부지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한 비유로 보아도 될 거 같아요.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