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타인을 볼 때에는 자신이 가진 생각의 틀로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최정화의 <지극히 내성적인> 작품집은 이 생각에 확고함을 더해주었다. 신을 이해하지 못해 대신 믿어야 하는 문제와 같다. 지구 반바퀴를 날아가는 새들의 방향 감각이 전자기라는 인간은 가지지 못한 감각 때문이라는 것을, 전자기라는 개념과 이름을 과학적으로 발견되기 전에는 결코 이해불가능했던 것과 같은 일이다.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처럼, 타인에게는 들여다 볼 수 없는 컴컴한 영역이 존재한다. 친숙한 타인이라 하더라도 그 어느 곳 알 수 없는 이해불가의 영역이 존재한다. 가족이거나 가장 친한 친구이거나 할 것 없이 말이다. 양보와 배려 따위가 이해의 근처에서 그 몫을 대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해와 완전히 치환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 방식대로 내가 해석하는 틀 내에서 바라보는 일만이 가능한 것이다.  


타인에 대한 소통의 문제로 인해 우리는 참으로 많은 시간을 기울여 온 힘을 다해 우리를 설명한다. 때로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그 사람의 성격을 설명해주는 이름을 붙이면 심리적으로 위안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남을 그렇게 모른다면 자기 자신은 어떨까. 때로 타인의 해석으로 발견하는 자신이 신선할 때도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춤을 출 줄 모르는 고래에게, 유연한 몸놀림이 천재적 춤꾼의 기질을 보여준다고 말하면 막 스스로의 재능을 발견한 고래는 춤추는 법을 터득할 수도 있다.


최화정의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독자는 타인을 묘사하는 또다른 타인을 타인의 시선으로 본다. <구두>의 경우처럼, 도우미를 열심히 설명하는 화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독자는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를 통해, 그리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희미한 열린 결말을 통해 결국은 자신과 만난다.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자신을 해석하는 틀의 방향을 이리 저리 돌려보게 된다. 도우미가 실제로 화자가 보는 것처럼 무슨무슨 증후군의 환자인 것인지 혹은 화자의 과민한 성격이 타인에 대한 경계와 계급의식과 결합해 낳은 상상의 산물인 것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자신이 도우미로서의 처지를 잃고 마치 안주인이 된 걸로 착각해서 구두를 바꾸어 신고 간 것이라는 화자의 의심은 타당한가 아닌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도우미를 처음부터 경계하고 의심하는 화자는 독자에게 화자가 설명하는 도우미만큼이나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이를 화자 역시 알고 있다.  이처럼, <지극히 내성적인>은 정신적 문제를 지닌 타인들을 의심과 관찰의 눈으로 바라보는 화자들 역시 문제적인 성격을 말해주는 자잘한 단서들을 지닌다.  


<구두>에서와 같이 작품 속 인물들은 대체로 문제적인 성격을 지녔다. <팜비치>에서 남자가 바라보는 여자는 허영과 사치로 일관하면서 남편을 무시하는데, 그녀와 대조되는 남자는 그저 아내를 바라보고 아내의 명령에 아무 저항도 없이 따르는 문제적 남자다.  발바닥을 베어 살점이 떨어져나가 피를 흘리고 다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정도로 무감각한 남자의 무기력이 아슬아슬한 긴장을 이룬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는 약국에서 강박적으로 보조식품을 사먹던 여자와 결혼한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자의 강박적 모습이 담겨있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에서 작가가 세들어 사는 집의 주인인 화자는 평범한 듯 하면서도 작가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동성애적인지를 의심케 하는데, 사소한 말과 행동에서도 이상하리만큼 긴장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작가를 향한 나의 마음이 이상한 강박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눈치채기 어렵기 때문이다.   <파란집>의 그녀가 인테리어용 책으로 적격인 두께와 색상의 책을 골라 꽂았는데 하필, 하이데거의 책이다. 집들이에 왔던 남편 동료들에게 (여상을 나왔음에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대답하고, 철학이 전공이었던 남편 동료에게 그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현존재에 대해 묻자 현준재로 알고 희성이라고 대답한다. 


이 작품집에서 주목할만한 공통점은 관계의 변화이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두 번에 걸쳐서 만들어지는데, 유명한 작가라는 생각에 작가와 친해지고 싶지만 작가가 버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서서히 작가와 가까와지고 둘이 함께 외출도 하고 매우 즐거운 시간을 지내는 첫번째 단계와, 어떤 단계에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작품에 대해 부정적이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결국 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깨지는 두번째 단계가 그러하다. 이러한 단계에서 화자는 매우 섭섭함을 느끼지만 곧 출간된 그녀의 책 첫장에 인쇄된 '지난여름을 내내 함께한 너에게'라는 글귀가 자신을 향해있음을 확신하고, 또 소설의 내용이 자신과 그녀의 이야기라고 확신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생각이고 실제로 작가가 그녀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구두>의 경우에서처럼 알 수 없는 일이다. <틀니>에서 사고로 앞니를 잃어 틀니를 해야 하는 남편은 초라한 아내에게는 비교가 안될 만큼 완벽한 사람이었지만 남자가 집에서 <틀니>를 빼면서 그 관계는 조금씩 바뀌어가다가 급기야는 역전된다. <홍로>는  친구들 앞에서 남자가 시작한 거짓말 때문에 시작한 동거녀의 거짓말이 초라한 동거녀의 자아와 치환되면서 자신만만해지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사실혼을 유지하면서도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이던 이제까지 둘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깨는 사건이 실제 자신의 모습이 아닌 허구 속에서 왔음이 동거녀에게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남자가 시작한 거짓말 속의 그녀 즉 대학을 나왔으며, 아들은 교사인 그녀로 착각한 동거녀의 모습은 작가가 묘사하는 그라는 화자의 생각이다. 실제로 그녀의 상기된 모습이 스스로의 거짓말에 의해 창조된 허구의 자신에서 전달된 자신감인지, 혹은 남자의 거짓말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잘 대응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즐겁게 보낸 한 낮의 시간 때문인지 알 수 없다. <파란집>의 그녀는 결국 그 파란책을 계기로 하이데거 철학에 파묻혀 '남편과는 다른 땅을 딛고 서'있는 존재가 된다. 


<대머리>는 얼마 전 읽은 헨리 제임스의 <워싱턴 스퀘어>에 등장하는 모리스를 연상시키는 한 제비족 남자의 시선으로, 여자와 여자의 사촌을 본다. 자신의 능력으로 돈 많은 여자를 접수했는줄 알았는데 아버지 대신 등장한 사촌이 전한 진실은, 실패한 남자만 골라서 선택한다는 여자의 독특한 남자 선택 방식이다. 여기서 남자는 실패한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여자를 견딜 수 없다. 모욕감을 준 사촌보다 동정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선택한 여자의 따스한 시선이 더욱 모욕적인 것이다. 몰릴 때 까지 몰려, 이 여자를 낛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느 밑바닥까지로 추락했을 지 모를, 통장 잔고는 네다섯자리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남자는 이제야 못생긴 여자의 얼굴과 보라카이를 보카라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무식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저울질을 하지만, 이 여자 말고는 대안이 없음을 깨닫는다. 소설의 제목이 대머리인데 사촌의 머리가 듬성듬성 빠져 취한 김에 사촌을 어이 대머리라고 부르고 낄낄거리기 시작한다. 여자 대머리를 본 적이 없는 남자는 여자와의 결혼에 걸림돌이던 사촌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즐거워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