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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평생 일부일처제의 관습이 인간에게서 보편적인 특성이 된 계기가 그 무엇이었더라도, 그것은 서서히 부식되고 부서져가고 있으며,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미 높은 이혼율과, 주거 등 필요에 의해 때 서로 함께 살다가 불필요하면 쉽게 헤어지는 동거족, 그리고 아예 혼자 사는 싱글족들의 급부상은 앞으로의 사회가 전통적 결혼을 기반으로 가족단위의 모습과는 달라질 것을 예고한다. 평소 다양한 형태의 계약결혼을 대안으로 여러 상상력을 펼치던 중, 김려령이 창조해낸 NM결혼은 새로운 시도로 다가왔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결혼이 아닌 서비스 개념이다. 아마도 결혼정보회사에서 법적 정서적 구속력을 가진 결혼이 아닌 소꿉놀이에 불과한 결혼 코스프레의 상대를 찾는 돈 많은 회원들이 있다는 낌새를 포착하고 발빠르게 1년 단위의 결혼상품을 론칭했으리라는 짐작이다. 난립하는 결혼정보회사에서 틈새 시장의 수요를 찾아 시장을 만들어낸 훌륭한 기획이다. 상품적으로는 말이다.
진화상, 결혼이라는 제도에까지 이르게된 계기가 유전자 전달, 즉 섹스의 목적에서 시작된만큼 해당 상품이 섹스리스이건 아니건 성적 결합(혹은 거부)에서 오는 정서적 부분은 아마도 결혼 생활 전체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한지붕 밑에서, NM 배우자와 섹스를 포함한 모든 결혼생활을 1년간이나 계속하면서, 사랑만큼은 금지된 것. 이런 형식의 결혼이 잔인한 것은, 그 결혼이 물질적인 보상을 기반으로 서비스 제공과 금전의 맞교환적인 형식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FW(Field Wife) 인지는 하는듯 마는듯 산만하고 열의만 가득한 남편의 섹스 스킬이 못마땅하고 시큰둥하지만, 연륜에서 나온 그의 대화와 예술가적인 프로페셔널함에 끌리는 듯하다. 그러나 NM 6년차 베테랑인 그녀는 산전수전 겪어, 상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정적으로 자신을 잘 통제하고 다룰 줄 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오랜 동성 친구의 고백, 스토커 문제들이 간간히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김려령이 제시한 결혼형태는 흥미롭다. 그것이 자의가 아닌 이십대 청춘이 구직의 끝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읽기에는 이질적인 다른 묵직한 주제들이 서사의 큰 틀에서 불쑥 불쑥 끼여드는 느낌이었다. 사실 결혼정보회사에서 계약결혼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그 발상에서 나온 여러가지 부산물 만으로도 충분히 소설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훌륭한 서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거기에 스토커와 동성애의 문제, 부모와의 갈등 등이 함께 다루어진다. 책은 200페이지 남짓.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 했다는 생각보다는, 상상력을 치열하게 문제 의식으로 다루는 데 실패하여 그냥 여러 이야기를 끼워넣은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