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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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시간은 함께 호흡한다. 기억이 날숨이라면 시간은 들숨이다. 기억은 시간 속을 미끄러진다. 맑은 빙판 위로 아이스 스케이트 날처럼 시간 위로 기억이 미끄러져간다. 때로 엄청난 스피드를 내며 쏜살같이 사라지고, 때로 우아하게 제자리를 스핀하고, 때론 중력을 거스르며 드높이 뛰어올라 허공 속에서 뱅그르르 돈다. <요요>는 긴 인생 중 맞닥뜨린 몇 달간의 아주 짧게 경험한 사랑과 그것을 평생 간직한 시계공의 이야기다. 초침과 분침의 영원한 회전 속에 갇힌 시간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잊지도 흘려보내지도 못한 사랑의 어긋남을 닮았다. 달콤함은 순간이다. 나머지 시간들은 감내해야 하는 그리움과 슬픔 뿐. 그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본질인 아픔은 시계 속에 갇혀 버린 시간처럼 뻗어나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순환한다. 사랑은 그렇게 정지된 시간처럼, 멈추어버린 초침처럼, 만들다 말아버린 시계처럼, '독립시계제작자'의 같은 자리를 머문다.  사랑이라는 따스함이 흐르는 그 세상은 창공을 날아오른 트리플 러츠처럼 강렬하게 기억되는 오로지 하나의, 변하지 않는 풍경이 된다, 중력을 거스른 채 영원히 멈추어 선 삶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땅을 치고 후회해도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 속에서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아마도, 우리가 후회하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심정의 기억을 시간 속에 흘려보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그렇게 남겨진 섬광처럼 떠오르곤 하는 순간들을 멈춘 시간 속에 담아 둔다. 


<상황과 비율>은 김중혁스러운 문체와 능청스러움이 돋보이면서도 다른 소설들보다 조금은 더 희망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담고 있어서 좋았다. 작품이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실종된 포르노 여배우 송미를 찾아 설득하는 '상황감독' 차양준의 이야기다. 포르노 여배우라는, 어찌보면 극한 직업인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야 했을 때에는 아마도 온갖 세상사의 파란만장한 질곡을 충분히 견뎌냈으며, 따라서 어떤 종류의 치욕에도 둔감해졌으리라 짐작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든, 만족스런 선택이었든 그 모든 것이 부서지는 것은 짧은 순간이다. 삶에서 진실을 가르쳐주는 순간은 때로 무참하다. 얼굴 가득 정액 묻은 모습으로 화면을 향해 환하게 웃어야 하는 순간은, 그 순간에 흐르던 눈물과 섞여 뒤범벅이된 정액은, 포르노 여배우의 삶을 조용히 찢었을 것이다.  차양준에게서 받은 PD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짧지만 견고한 약속은 송이에게 찢겨진 삶의 일부를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다른 형태로 비약시켜주는 신뢰였을 것이다. 절정의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은 이제 특별하다. 얼굴에 정액이 흐르는 엔딩 대신 새로 찍는 섹스 씬의 절정의 순간에 차양준은 송이와 두 눈이 마주친다. 여배우의 절정을 이끄는 탁구공, 그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차양준 이 두 남녀의 짧은 교감은 그 어떤 순수한 사랑 못지 않은 담백한 여운을 남긴다. 


때로 사랑은 서로 안아주는 것,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된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서 이규호는 알콜중독자다. 오래 전에 아마도 자신의 알콜중독으로 인한 어떤 지긋지긋한 문제로 인해 떠나게 했을 옛 여자 친구 정윤을 만나 술을 마신다. 버려지고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드러낸다. 술을 마시면 거절당했을 때의 장면만 무한반복된다. 피존의 이야기를 빌어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윤은 이규호가 점점 더 취해가고 있고, 취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더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언제 자리를 떠야 코꿰이지 않고 난처한 상황을 피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을만큼 그의 술버릇에 대해 익숙하다. 살살 구스르고 대화를 들어주며 이규호의 비위를 맞춰가며 언제 일어날까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 번만 안아주고 가라. 이 부탁을 정윤은 들어줄 수 없다.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이규호도 안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의 움푹 들어간 자리가 서서히 복구되는 것을 보면서 규호는 정윤이 마시던 커피잔을 치우고 그곳에 소주잔을 놓는다. 사랑이 떠나간 자리엔 바람이 불고, 먹다 남긴 땅콩 껍질이 바람에 흩어진다. 그렇게 초라하게 남겨져 홀로된 알콜중독자는, 살겠다고 붙잡은 가짜 팔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추락해가는 나약한 중독자의 영혼이다. 중독자가 아닌 사람은 중독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함께 했던 시간이 인생의 일부였던 정윤은 그 아비규환 속을 통과했던 아픔 만큼이나 규환을 향한 측은지심이 남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붙잡으면 떨어져 나올 그 마네킹의 가짜 팔이나마 잠시 내어준 정윤이 참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중혁 스타일이라는 견고한 실타래를 풀어가며 엮여진 스토리들은 남녀의 짧고 긴 만남을 시간과 기억이라는 묵직한 주제와 함께 지독한 사랑의 본질을 유쾌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가슴 찡한 진실을 담아 섬세하게 엮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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