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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우리가 언젠가는 듣거나 읽어서 알고 있던 많은 종류의 동화들은 대개 해피하게 끝을 맺는다. 위기에 빠진 공주는 왕자와 만나 결혼하고, 못된 계모들은 천벌을 받고, 저주받은 마법은 풀린다. 불행하게 끝나는 경우도 많다. 왕자를 사랑한 인어공주는 한마디 항변도 못한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성냥을 팔던 소녀는 추운 겨울에 남의 집 창문 앞에서 시린손을 성냥불로 녹이면서 죽어간다. 이렇게 닫겨진 이야기의 문을 다시 열고, 활자 이래로 박제되어 있던 이야기의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것이 이 책이다.
빨간구두당은 색을 잃은 세계에 어느날 찾아온 빨간색에 관한 이야기다. 색을 잃은 세계에 색깔은 전설이다. 까마득한 윗 대의 선조, 증조부의 증조부의 증조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색이라는 개념에 대해 현재 세대는 완벽하게 무지하다. 색이 없이 흑백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판단 능력은 그들이 식별해낼 수 있는 흑백의 색만큼이나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한 무지라는 질서 속에 찾아온 빨간구두를 신은 춤추는 처녀는 마을을 찢어놓는다. 빨간 구두를 신은 처녀는 춤을 멈추지 못하고, 빨간 구두의 빨간 색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빨간 구두가 보이면서 빨간 색을 가진 물건을 식별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렇게 마을은 빨간색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뉜다. 빨간구두가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빨간구두당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이고, 첫번째 이야기의 제목이다.
빨간구두당은 안델센의 빨간구두의 변주이고, 개구리왕 또는 강철의 하인리히는 그림형제의 동명 동화의 변주인 것 같다. 새뮤얼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 그림형제의 영리한 엘제, 거위지기 아가씨, 성냥팔이 소녀 등이 그림형제의 동일 제목의 민담 동화에서 따왔으나, 내용은 수많은 설화와 전래동화들을 다채롭게 변형하고 윤색하고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전혀 새로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한편 한편의 단편들은 넘치도록 많은 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의 모티브들은 여러 버전으로 알려진 동화와 전설에서 가져왔고, 이 모티브들은 주요 서사의 뼈대와 혈관이 되어 이야기를 완성한다. 처연하며 아름답고 강렬한 동화의 은밀한 내면은 현재 우리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시끄럽고 화려하고 잔인한 환상의 세계 속에서 현실을 소환하는 것. 그 조용한 성찰. 그것이 구병모 소설의 특징이자 책을 쥐고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현대적이면서도, 과도한 자의식이나 지식의 나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고,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기묘한 세계를 다루는데, 그 세계에 현실보다도 더욱 불편한 리얼리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풍자로 읽어내고 말 수는 없는,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과 풍부한 서사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