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소설이 어디까지 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까. <작가란 무엇인가 1>에서 읽은 내용을 돌아보면 어떤 작가는 드러나는 사회 참여는 문학이 될 수 없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치고, 어떤 작가들은 스스로가 매우 정치적이라고 여긴다. 마르케스같은 작가는 정치와 문학을 떼어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영미 작가들은 문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환경에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정치적이고도 사회 참여적인 의도가 불순해질 수 있는 특권적 환경이라는 차이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떤 제도적 틀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것과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음을 안다. 희노애락을 일으키는 감정은 시스템의 틀 안에서 움직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그 견고한 시스템을 깰 수 있을까. 혹은 알릴 수 있을까.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아버지가 거대한 공장의 톱니바퀴 사이로 몸이 끼어 죽은 후, 그 남겨진 가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 <백의 그림자>는 <계속해보겠습니다>보다 몇년 앞서 쓰였다. 후에 쓰인 소설이 그 이후의 삶이라면, 먼저 쓰인 이 소설은 삶을 부수는 거대한 시스템이라는 톱니바퀴가 가장의 육체적인 몸 대신 가장의 경제권이라는 일터를 아작내기 위해 다가오는 상황을 그림자라는 장치에 결합시킨다. 


세운상가는 뭔가를 고치러, 혹은 뭔가를 사러 예전에 몇번 다녀봤던 기억과 종로를 지날 때마다 눈에 익어서 소설 내에 배경 설명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생생하게 공간적인 장면들이 머리속에 훤히 그려졌다. 철거를 앞둔 세운상가에서 앰프를 고치고, 부품들을 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고전 영미권 소설을 읽을 때만큼 배경 설명이 긴 것도 아닌데도 그 복잡하고 얽히고 설킨 복도와 골목 구조, 그리고 가게 속에 수십년간 모아온 부품들과 작은 물건들이 뺴곡히 어지럽게 쌓인 모습들의 모습이 영화를 본 것처럼 생생하게 머리속에 그려졌다. 


선량한 사람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느 날 그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그들과 그들 주변의 사람들에겐 그림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자가 갑자기 일어서는 것이다. 왜 그림자일까. 그림자는 물체가 빛을 가려서 드리워지는 검은 형체다. 그것은 빛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은 빛을 반사함으로서 색깔을 만들어내는데 어떤 물체가 그것을 가리면 그 물체가 햇빛을 가리는 부분인 것이다. 그림자는 즉, 빛을 받지 못한 부분이다. 가리워진 부분이다. 일부러 감추려고 하지 않았지만 감추어진 모습이다. 당연히 사람의 그림자는 그 사람의 발바닥에 붙어서 바닥에 누워서 따라 다녀야 할 것인데, 그림자 혼자서 생명이 있는 듯 벌떡 일어나서 단독적으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여자(은교)는 맨 처음 자기를 떠나 돌아다니는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숲에서 길을 잃는다. 남자(무재)는 그런 여자를 따라간다. 그림자를 따라 들어왔다는 말을 하자, 자신의 아버지의 그림자도 일어섰다며,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 것을 충고한다. 아홉식구의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빚보증을 섰다가 그 빚을 갚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점점 더 늘어나는 빚을 안고, 끝내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림자가 일어섰고, 그 그림자를 따라다녔다. 그 빚은 고스란히 무재에게 전가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림자는 죽음을 암시하는 걸까. 


철거가 가까와오고 사람들이 하나둘 씩 떠나 스산한 세운 상가의 어두운 이야기를 따스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이 두 사람이 서로 가까와지는 모습이다. 둘은 함께 긿을 잃지만 농가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다. 이후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도 그랬고, 현대 소설들이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지만 둘의 대화는 따옴표 없이 이루어지는데 지문보다 대화가 많을 만큼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대화다. 짤막 짤막한 말들의 주고 받음 속에는 문장으로 단언하지 못하는 숱한 의미들과 상징을 끌어안고 간다. 쇄골이 반듯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무재는 자신의 쇄골은 삐뚤빼뚤하다는 은교에게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라고 말한다. 안개비가 내리는 밤 등나무 아래에서의 대화는 아마도 두 사람의 인생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일 것이다. 



등나무 잎을 삶으면, 하고 무재씨가 문득 말했다.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금이 간 부부 사이의 금슬이 다시 좋아진대요.

그렇대요?

언제고 우리 틈에 금이 가면 삶아서 마실까요?

라는 말에 당황해서 우리는 부부도 뭣도 아닌데, 라고 얼버무리자 무재씨가 우산 속에서 싱글벙글 웃었다. 나는 흠 하고 기침을 했다.

금슬은 잘 모르겠지만 무재씨, 이렇게 앉아 있으니 배도 따뜻하고, 좋네요.

네, 

그냥 좋네요.

하며 밤을 바라보면서 앉아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끝내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 인내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림자가 일어서는 경험을 한다. 은교의 입을 통해 뭔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사람에게서 떠나 땅에서 일어난다. 가게 주인 아저씨의 지인인, 한 기러기 아빠는 모든 걸 희생해서 아이들에게 올인했지만, 비행기값을 아껴 오랜만에 방문한 외국에서 아이에게 아빠가 챙피하니 친구가 오면 밖에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기러기 아버지의 그림자도 일어난다. 가끔 가게를 들러 2천원을 달라곤 하는 유곤 역시 오랜동안 세운상가와 함께 세월을 보낸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타워크레인의 추가 삼십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즉사했고, 그 이후로 어머니의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림자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많은 상징을 대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이 더이상 버티기 어려울 때, 그림자는 돌연코 일어나서 그림자이기를 거부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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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애 2016-03-09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안에 따뜻함과 사랑이 그 몇 마디 대화 속에 오롯이 피어날 때 그래 그래도 우리는... 하며 삶을 다시 따뜻하게 바라봅니다. 그게 황정은 소설을 읽고 다시 읽는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CREBBP 2016-03-09 15:46   좋아요 0 | URL
저는 황정은의 소설은 두 권밖에 안읽었지만(한 작가의 작품을 여러 개 읽는 편이 아니라 그래도 많이 읽은 편) 묵직한 메시지를 줄 뿐만 아니라, 그 묵직하고 어두운 것들 속에서 너무나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것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다른 소설들도 읽어야겠어요

2016-03-17 15: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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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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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17: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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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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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2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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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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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9 1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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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1 1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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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1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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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1 16: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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