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까지 총 158 쪽인데 슈테판 츠바이크가 자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쓴 체스 이야기와 1922 년에 쓴 낯선 여인의 편지 이렇게 2편의 단편이 들어 있다. 유명인들의 전기와 희곡 오페라 산문 등 많은 작품을 남긴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대인의 정신적 유산은 가지지 않은 핏줄만 유대인이었고 그럼에도 나치에게 쫓겨 망명을 거듭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래 전에 국내 소설가 김연수 이름으로 예스24에서 책을 검색해보니 이 책이 역자로 나오길래 김연수가 번역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독문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니 소설가 김연수가 이 책을 번역했을리가. 역자는 동명이인이었지만 서점의 DB는 저자의 동명이인을 구분하는 개별 아이디 번호 같은 걸 구축하지 않은 모양이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1에서 30까지가 세트로 있는데 그 중 가장 얇은 걸 골랐다. 두편의 단편이지만 다소 길고 완결성도 있는 단편이다. 누구나 쉽게 빨려들어갈 것 같은 집중된 주제를 매우 치밀한 심리 묘사와 함께 다루고 있다.
자정 무렵,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출항 예정인 대형여객선 위는 출발 직전 흔히 볼수있는 일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첫 문장이다. 제목처럼 이 배 위에서체스 게임을 하게 되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액자 구조로 다루어진다. 한 남자는 세계 챔피언 미르코 첸토비치이다. 이 거만한 새계참피언은 체스 이외에는 문법에 맞는 세문 하나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무식하고 촌스럽고 서툴고 상스러운 인물이다 . 비천한 출신의 학습부진 아이가 신부 집에서 가정교사까지 두고 양육되나 가망도 열의도 안보이다가 우연히 신부가 두다 놓고 떠난 자리에 앉아 그동안 어깨 너머로 익힌 기술로 상대를 이기고 마을 사람들을 이기고 유럽과 대서양을 횡단하며 승승장구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자 없는 명성을 누린다.
반면 우연히 그와 대결을 펼치게 되는 B는 한 번도 체스를 두어본 적이 없는 남자다. 체스판과 말도 처음 본다. 황실의 재산 은닉을 돕던 그는 게스타포에 체포되어 완벽한 무의 시공이라는 독방 체험을 한다. 그 독방 생활의 압박에 대한 심리적인 묘사가 어찌나 탁월한지 그곳을 경험한 것이 아닐까 추측될 정도이다.
생각도 무를 견디지 못합니다. 뭔가를 기다렸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또 다시 기다렸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관자놀이에 통증이 느껴질 때 까지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혼자 있었습니다. 혼자.. 혼자서.. 46
제 주위에는 놀라울 정도로 항상 똑같은 것만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저의 생각, 저의 망상적 병적인 반복으로부터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줄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이 점을 노렸던 겁니다. 저는 생각들을 억지로 삼키고 또 삼켜야 했습니다. 49
활자에 굶주린 그는 심문을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벽에 걸린 '7 월 27' 일이라는 몇 안되는 그 숫자를 응시하고 또 응시하며 뇌 속에 집어 넣듯 삼킨다. 그러던 중 벽에 걸린 물고문용 젖은 코트 속에서 작은 책 한 권을 훔쳐 내는데 알고보니 체스 교습서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체스판과 말들을 체크 무늬의 담요와 먹다 남은 빵조각으로 대체했으나 곧 머리속에 체스판과 말들의 세상이 열리고 교습서의 내용에 따라 수도 없이 게임을 하다가 그 마저도 너무나 완벽하게 암기해버려 독방의 무를 상대할 수 없어지자 자아를 둘로 분열시켜 게임을 하는 발상을 해낸다.
검은 말과 흰 말이 동일한 사람이라면 모순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의 두뇌가 뭔가를 알아야 하는 동시에 또 몰라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인 흰 말의 역할을 하면서 1분 전에 검은 말로서 의도했던 바를 완전히 잊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61
그는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맞서는 상상의 공간 위에 두 개의 분열된 자아를 투사시킨 채 예순 네 칸 위의 형체를 그때그때 붙들면서 그 무의 시공간 속에서 진짜로 분열되어 간다.
이런 사연을 가진 두 사람이 체스 시합의 이야기로 돌아와 맺게 된다.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가 히틀러와 게슈타포라는 시대 속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는 것이다 .
길어져서 낯선 여인의 편지는 다른 게시물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