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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오래전에 한국 아이를 입양해서 기르는 외국인 부모를 만난 적이 있다. 이십년에 가까운 십여년 전에, 유럽 여행, 정확히는 알프스 산자락 어딘가의 오토캠핑장에서 아주 멋진 카라반 차를 운전해서 여행하고 있던 스웨덴 부부였다. 어린 두 꼬마를 닳도록 쪽쪽 빨고 예뻐했는데, 동양인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차 한대에 내 동생, 아장아장 걷던 우리 아기를 포함한 우리 식구가 담요들과 아기용품들을 싣고 유럽 여행을 하면서 예약된 오토캠핑장에서 묵었다. 텐트는 모든 필요 시설과 가재도구들을 갖추었지만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성수기를 피해야 했다. 밤마다 춥고 비가 오면 들이찼다. 그들의 카라반은 요즘 흔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카라반이 아니라 번쩍 번쩍 윤이 나는 인테리어로 완벽한 1급 호텔을 재현한 대형 카라반 차였다. 아.. 저런 데서좀 자 봤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섞었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들이었다. 친형제들이라고 했다. 나의 관심은 그 카라반에 한 번 들어가서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럴 기회가 있었다. 초대받은 카라반에서 휘둥그레 눈알을 굴리며 감탄하던 중 그 부모의 관심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외곽에 부잡스럽게 아장거리는 아기와 기저귀와 딸랑이와 이불보따리를 싣고 다니며, 비가 새는 텐트 속에서 자는 동양인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대형 카라반 가족이 어디있을까. 마치 중세시대 귀족과 농부 같은 차이. 그들이 우리를 사귀고 싶었던 건 바로 자기 아이들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것이었다.
당시 아마도 수잔브링크의 아리랑 이라는 고 최진실 주연의 영화가 나온 때랑도 비슷했을 거라고 추축되는데, 내가 들은 입양아의 현실과 그 부모들에게서 느낀 입양부모의 갭은 컸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아주 많이 궁금해했다. 그리고 약간의 한국어도 할 줄 알았다. 스웨덴의 학교에서는 모국어를 배울 수 있는데, 아이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학교 예산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도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렸지만, 유치원 단계의 학교 교육을 받는 모양이었고, 특히 입양부모들끼리 모임도 있어서, 아이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이런 저런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아이에게 가끔 편지도 써주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우리와의 대화에서 관심있던 것은 한국의 아리랑이니 불고기니 하는 한국적 문화, 즉 자기 아이들의 오리지낼러티들을 입양모 모임때마다 함께 나누는데, 한국 사람이 부족해서 충분치 않고, 자기들끼리 그냥 여기저기서 본 것들을 흉내내는 것에 다름없었는데, 나를 만나니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였다. 자신의 아이들이 온 동양적 신비가 어린 그곳에 대해. 나는 꼭 편지를 해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정말로 아직까지도 가슴 한 켠 싸아하게 저려오도록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 때 내 생각에, 그 행복한 아이에게 한국이라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그들을 버린 곳인데? 그들은 그것을 원할까? 정체성을 심어준다는 핑계로 거리감을 두는 것은 아닐까. 그 때 마음은 아이들을 잘 사귀어 두었다가 나중에 한국에도 올 수 있도록 주선을 해봐야지 라는 생각이었으나, 나중에는 아마도 편지쓰기가 싫어서였을까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이라면 페북을 통해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을텐데. 남매로 기억하는데 여자 아이의 나이가 아마 카밀라의 나이만큼 되었을 것이다. 수줍어서 나와는 말을 별로 섞지 못했지만 우리 아기를 데리고 바깥에서 티없이 잘 놀았었다.
제목도 시적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 카밀라는 내가 만난 아이들과는 반대 상황에 있다. 입양아에 대한 집착적 애정은 입양 아이가 언젠가 친모를 찾아 떠날까 불안하게 한다. 아이에게 불행의 씨앗은 태초에 친모에게 버려졌다는 생각, 상실된 정체성으로의 갈구 때문이지 양모의 애정부족이 아니었음을 양모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사랑을 산만큼 퍼주어도 채워지지 않는 한 구석을 내가 만난 스웨덴 부모처럼 채워주려 노력했더라면 아마도 그런 것 따위 귀찮은 한복 아리랑 김밥 불고기 행사 같은 것 안중에도 없는 평범한 십대를 보내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애증 역시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밀라의 양모는 가족이 어렵게 보낸 편지를 아이에게서 숨긴다. 진실은 언제나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밝혀지는가. 카밀라의 양모는 카밀라를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안니었지만 카밀라에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이자 엄마였다. 주소 라는 그 한 조각 정보를 알기 위해 통과해야 했을 수도 없을 행정상의 벽, 기억의 벽, 외면의 벽, 무관심의 벽,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아이의 턱 앞에까지 아슬아슬 닿았으련만, 양모마저 떠난 세상에 덩그마니 혼자 남겨졌을 때, 카밀라에게 주어진 단서는 자신의 핏줄이 자신을 찾아 소식을 전했었다는 것 뿐. 그리고 이제 친부에게서 받은 짐 박스에서 버려질 운명에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발견된 사진 한 장이 손 안에 있다. 그 작은 단서 하나에 의지해 자신의 뿌리를 찾아온 한국. 양모의 욕심으로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 카밀라는 검은 바다를 건넌다.
사실 책을 읽을 때는, 누가 아빠일까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집중했으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생각해보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열일곱살 짜리 소녀아이가 낳은 아이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만큼 멀티플한 애정행각을 벌였을까. 이미 친모가 죽은 상황에서, 카밀라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종잡을 수 없게, 엄청나고 추악한 비밀 속을 헤치고 들어갔을 때에 밝혀지는 것은 어머니의 존재다. 카밀라의 현재 나이보다도 어렸던 어머니가 쓴 시와 문학 속에서 잠들어 있는 사랑, 그리고 생명.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한국의 TV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을 캐는 일은 약방의 감초같은 소재지만, 그 모든 비밀 하나 하나에는 제각기 다른 사연들이 있다. 거기에는 버려짐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고, 버려진 후의 삶이 있고, 버린 후의 삶이 있다. 그것들의 조합은 무궁무진하다. 그렇기에 진부한 클리쉐에 불과할 지라도, 아무리 반복해서 재현하고 수정하고 따라한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 새로운 이야기로 와닿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