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의 땡볕 아래, 젊고 허약한 지식인과 인생을 달관한 듯한 상남자 조르바가 보여준 우정. 그것은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없던 것을 발견하는 인생의 성장 지점이기도 하고, 또한 이야기적으로는 수많은 비극과 실패가 통곡과 웃음으로 빚어내는 인생의 한판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기억으로 새겨졌기에 마치 다가왔다 물러선 잔잔한 파도같은 따스한 그리움이 다가왔다 물러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속에서 조르바라는 인물은 어딘가 살아있을 것 같은 생생하게 펄떡이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작중 화자가 조르바에 대해 쓴 1인칭 관찰자 시점이어서, 주인공의 속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신비하고 매력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전적으로 작중 화자의 시각에 의지해서 그의 괴짜 같은 행동을 설득당하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 주인공이 직접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친근하게 머무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은데 조르바는 그런 사람이다. 삼촌같은 사람. 기대하지 않고 있던 어느날 문득 환한 미소와 초콜렛 같은 걸 잔뜩 사다 들고 처들어 와서는 그동안 떠돌아 다니며 생긴 일들에 허풍을 90프로는 섞어 맘껏 떠벌이고 특유의 걸죽한 입담으로 모든 사람들을 혹 하게 만들어버리는 삼촌 혹은 옆집 친구의 삼촌 같은 사람. 그 사람의 이야기는 책으로 세상을 배우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젊은날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자신을 모델로 하는 화자가 젊은 피를 정의에 바치기로 작정하고 뛰어든 친구와 작별하고 크레타 섬의 갈탄광산으로 향하면서 친구를 회상하는 장면에서시작된다. 책과 친구와의 작별 등으로 복잡한 머리 속 생각들로 가득찬 그에게 이내 선물처럼 짠 하고 나타난 조르바가 나도 데려가 달라며, 아마도 쓸모가 있을 거라며 스프를 잘 만들 줄 안다고 끼어드는 첫 만남은 사랑하는 남녀의 첫만남처럼 인상깊다.
그리고 조르바에 매료된 작중 화자는 탄광 사업의 관리를 조르바에 거의 다 맡기고 운명적 크레타에서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책은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실제로 갈탄광 사업을 할 때 만났던 실존인물인 조르바를 대상으로 오랜 세월(아마도 20~30년)이 지난 후, 그를 회상하고 쓴 자전적 소설이다. 역자 이윤기님은 크레타 여행 중 카잔자키스 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실존인물이었던 조르바의 딸이 얼마전 찾아왔었더라는 것이다. 읽는 중에도 살짝 컨닝을 쳐서 조르바가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수십년이 흐른 후 그 기억과 각색에서 탄생한 소설의 내용들이 실제 인물과 같은 점은 지극히 조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이윤기님의 크레타 여행기 속에 등장한 조르바의 딸이라는 실존적 인물을 직접 대면했다는 소식은 조르바에 대한 소설적 환상이 사실적 경험담처럼 느껴지게 했다.
물론 인정한다. 소설가들은 어떤 인물에서 기가막히게 매력적인 특징을 포착하여 소설적인 각색을 거쳐 전혀 다른 인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는가. 그런데, 그의 실제 행보와 죽음이 소설 속에서의 묘사와 일치하고, 또한 그 딸이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로 세계적 작가가 되었고, 한 때는 그렇게 추종했던 멘토였던 조르바를 소설속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와 산투르를 뜯으며 춤을 출 것 같이 생생한 캐릭터로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 카잔자키스를 아마도 구소련이 붕괴된 다음에야 찾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신비한 소설적 이미지에 현실의 프레임을 한겹 더 씌움으로써 살아 꿈틀거리는 색상을 입힌다. 특히나, 소설 속 조르바는 설사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문학적으로 많이 정제한 느낌이 드는, 소설적에서나 만날 수 있는 매력 만점의 캐릭터였기에 작가의 박물관에 작중인물의 실존 딸이 방문했었다는 소식은 놀라왔다. 조르바의 성격은 만들어 낸 것처럼 기이하고 호탕하고 방탕하기도 하지만 한없이 따스하고 또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드문 개성의 매력 만점의 인물이다.
반면,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임이 분명한 화자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나약하다는 것은, 친구가 아마도 볼쉐비키 혁명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정의로운 행동에 과감하게 자신을 던지는 동안 자신은 자본가로서 돈을 벌 목적으로 갈탄광으로 가는 것에 대한 자기 비하적인 것으로 느껴졌는데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갈탄광 사업이 그야말로 악덕 자본가로서 노동력을 끌어모아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돈을 버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었고, 그 성공을 발판으로 자신과 동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야망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힌트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카잔차키스가 태어닌 1883년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그의 어린시절 두차례에 걸쳐 터키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두번째 반란에서 자치권을 얻는다. 그가 36세의 나이로 공공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볼세비키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처한 15만명의 그리스인들을 송환하는 임무를 맡고 평화협상에 참여하지만, 훗날 추종했던 민족주의자 드라구미스가 암살되고 자신을 임명했던 베니젤로스가 이끄는 자유당이 선거에서 패배하자 장관을 사임하고 붓다와 프로이트를 연구하다가 1922년 전쟁에서 그리스가 터키에 참패하자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 혁명가들에 동조한다. 이 때가 39세. 평생 많은 시간을 여행과 집필과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러시아 구석구석 및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기를 썼고희곡을 썼고, 번역을 했고, 교과서를 집필했고, 다시 정치에 뛰어들어 소수 좌파의 지도자가 되어 사회 민주주의 정당의 통합을 실현한 후에는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63세에 쓴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로, 이 책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 작가가 된다.
따라서 그의 성향은 이상향을 꿈꾼 사회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가 추종하는 조르바는 그러한 정제된 이상적인 사상에 앞서 인생을 경험한 경험자로서 오히려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을 주입한다. 그토록 갈구했던 어떤 진실, 책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진실을 조르바에게서 발견하는 기쁨을 이 책에서는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결국 무슨주의니 하는 것들, 민족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들은 개나 줘버려라라는 조르바의 사상을 그의 언행을 통해 나누는 것이다.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중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는 부분이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비하적인 발언인데, 예를 들어,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여성은 항상 남성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며, 남자된 자로서, 구원을 받으려면 모든 여성을 가엾이 여겨 그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존중이라는 게 다름아닌 섹스다. 그러기에 그는 가는 곳마다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는데, 한 마디로 바람기가 다분한 나쁜 남자라고 할 수 있으나, 그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쁜 남자처럼 여자를 등처먹거나 혹은 마음을 빼앗아서 원하는 것을 취한 후 재빠르게 다른 여성으로 관심사를 옮기는 전형적인 나쁜놈이 아니라, 혼자된 과부라든가, 소외된 여성들에게 입바른 찬사를 주어섬기고, 마음을 빼앗게 하는데, 그것이 묘하게 그들이 처한 지난한 외로움을 해소시켜주는 방향으로 악의 없이 진전되기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여성 독자로서도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여자란 늘 자기 운명을 슬퍼하는 동물이라느니, 말로 표현 못할 갖가지 언행들이 우스꽝스럽게 곳곳에 배치된다. 그러나 용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조르바의 편견에 가까운 어떤 집단에 대한 그의 생각은 여성 뿐만 아니라, 수도승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조르바의 한 마디 한마디가 그에게는 마른 대지에 내리는 봄비처럼 촉촉하게 활자로된 지식으로만으로 채워졌던 황량한 그의 지적 세계를 현실적 지혜로 채운다. 하느님, 회사의 이익, 그리고 과부가 조르바의 머릿속에서는 아무 모순도 없는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고 느끼는 '나'는 조르바의 망나니같은 행동을 끝도 없이 참아주고, 그의 말도 안되는 때로 우스꽝스러운 주장들 속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조르바 역시 그의 인생이 스스로 저지른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처로 남게 되었을 참혹하고 잔인했던 순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그가 세상을 몸으로 이해하게 되고 자조 섟인 듯한 깨달음이 어느 지점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돈을 끌어모으는 갈탄광의 사업이라는 배에 태워졌음에도, 아름다운 크레테 섬 바닷가 오두막에서 그는 갈탄광과는 머나먼 서정적인 세계에서 행복을 느끼고 그것을 찾는다. 마치 연애를 하듯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이 인생의 마디 마디를 성찰하고 인간이란 것의 어쩔 수 없는 슬픔을 공유한다. 결국 그들은 인생의 어떤 지점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참혹한 죽음을 경험하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 알쏭달쏭하지만 어쨌든 슬픈 기억으로 남을 사랑을 했고, 그 둘 모두 그 사랑을 무자비하고 처참한 방법으로 맞는 죽음에 변변히 맞서지도 못하고 공동체와 타협하고, 또한 그들이 함께 하는 무늬상의 이유였던 사업조차 말아먹은, 그야말로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지만, 마치 해피엔딩과도 같은 초월적 결말을 맺는다.
밖은 추웠고 바다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금성이 동쪽 하늘에서 까불락거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갔다. 나는 세월과 맞서 소리를 지르며 바보같이 흥청거렸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의 슬픔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허공중에서 바람을 받은 한 조각 구름처럼 내 인생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갔다.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이고 모였다가는 다시 모습을 바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