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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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학대, 괴롭힘이 끊이지 않고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의 초반부 혁명전 러시아의 한 공장 단지의 풍경을 보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폭력의 본질을 추측할 수 있다. 장시간의 노동으로 수십년간 대를 이어 일하는 그곳에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쉬임없는 노동으로 지친 영혼들에게 술은 유일한 보상이며, 폭력은 유일한 일탈이다. 힘겨운 노동을 끝내고 술과 싸움질과 욕설로 뒹굴다가 집에 들어오면 가정은 아늑함이 아니라 무거운 짐일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고 아버지를 때리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아들은 공포로 병들지만,  다시 자신의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아들에게 똑같은 지옥을 보여준다. 


노동환경과 폭력에 대한 인식이 바뀐 현대에, 호화로운 생활이 보장된 여유있는 중산층 이상 혹은 최 상류층 가정에도 폭력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이코패스처럼 다른  약한 사람을 해치는 것을 즐기는 유전자가 따로 있을 수도 있겠지만, 타고난 사이코패스의 뇌구조를 가진 제임스 팰런이 자신의 유전자와 행동을 분석한 <괴물의 심연>에 의하면, 설사 그런 유전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유전자를 최종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환경이다. 바른 아이로 잘 기르기 위해 가정에서 애지 중지 사랑을 들여 부어 키웠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어린 시기부터 유치원이라는 사회에 노출되어 있고, 아무런 힘도 없는 아이들은 어떤 종류의 학대에 은밀히 노출되어 있는지 부모가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연히 어떤 폭력적 유전 인자를 소지한 아이가 어린 시절의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형태의 학대나 뇌롭힘 혹은 폭력 같은 것에 노출되어, 매우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셀레스트

빛나는 미모의 착한 아내, 손에 대는 것마다 엄청난 수익을 내는 남편, 써도 써도 옹달샘처럼 차고 넘치는 부, 자상하고 배려심있는 남편, 개구진 두 쌍둥이 아들.  모든 것을 가져 아무것도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셀레스트 부부에게 은밀한 폭력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셀레스트와 페리 부부는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마을의 어느 부부도 하지 않을 폭력 속에서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매들린

결혼한 남편이 생후 한달 된 아기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는데, 그래서 싱글맘으로 그 힘겨운 시간들을 겪어내고 아이를 14살까지 키우고, 재혼을 하고, 다시 또 아이들을 (주렁주렁) 낳아 잘 살게 되었는데, 자신을 버린 전남편이 어떤 착하고 현명한 여자와 결혼을 해서 개과천선해 아주 가정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고는, 그걸 보여주려는 듯 자신이 버렸던 첫째 아이와 거리상 가깝다는 이유로 전부인이 살고 있는 해안가 마을로 이사를 오고, 또 그들이 같은 예비학교 학부모로 매일 마주쳐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기분이 어떨까.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기껏 힘겹게 키워놓은 아이가 자기 친엄마보다 아버지의 현재부인인 양엄마(맞나) 보니를 더 좋아하고, 그녀를 자신의 롤모델로 따를 뿐만 아니라, 그 양엄마의 엄마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다가 어느날 아버지 집에서 살겠다고, 이사를 나가버린다면 아무리 친딸이라고 해도, 아니 친딸이기 때문에 그 배반감을 어떻게 감당할까. 


14년간 혼자 키워온 딸이 전남편 집으로 나가버린 것만으로도 화가나 죽을 판국에, 그곳으로 가자마자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쪽집게 수학 과외 교사를 해고하고 쥐뿔도 모르는 전남편이 직접 가르친다고 하질 않나, 오밤중까지 잠자리에 들 생각은 않고 페북을 하고 있지를 않나, 그런 것들만 해도 붉으락 푸르락 지경인데, 나중에는 열네살 딸이 엠네스티의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순결을 팔겠다고 웹페이지를 만들어 홍보를 한다. 이때 전남편이라는 존재는 정말 죽이고 싶은 존재다. 이럴 때 차라리 폭력이라도 동원해서 한대 줘패주고 싶을꺼다. 그러나 매들린은 너무 수다스럽다. 매들린이 거의 주인공인 듯싶게 매들린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조금 골치아플 것 같다. 악의는 없지만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그래봤자 신발과 악세사리와 아이크림과 그런 것들이지만)을 메주알 고주알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딸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하소연한다. 그녀가 아이들의 학부모가 학원 폭력 문제로 두 패로 갈라졌을 때, 약자인 제인 쪽에 서게 된 것도 그녀의 본성이 약자에 대한 배려인지 혹은 학부모의 힘겨루기인지 알 수가 없다. 


제인

어린 나이에 사랑을 잃고 원나잇을 했는데, 덜컥 임신을 했고, 아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원나잇은 평범한 원나잇이 아니었다. 펍에서 노래도 불러주고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랑 한 잔 하다가 호텔로 직행했는데, 그는 못생기고 뚱뚱한 돼지년이라며 욕설을 하더니, 목을 조른다. 무슨 용어가 있는 모양인데, 죽기 직전까지 목을 조르면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 성욕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막 이사온 마을의 예비학교에서 작고 사랑스러운 여자 아이 아마벨로를 지속적으로 폭행한 아이로 지목되고, 학부모들은 증거도 없이 아이를 퇴학시키기 위한 탄원서들을 돌리며 패가 갈린다. 제인의 아이 지기는 비록 엄마 혼자 키우기는 했지만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이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랑스러운 아이였기에, 제인은 물론 담임도 지기가 폭력의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제인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내지른 폭행(목조르기)와 폭언을 기억하며, 아이가 그런 씨를 물려받았을까봐 전전긍긍한다. 



책이 엄청 두꺼운데, 대화가 많아 사실 읽어야 하는 글자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음에도 처음 약 1/3 그러니까 약 200페이지 정도는 진도가 엄청 안나갔다. 너무 많은 등장인물도 등장인물이지만, 새롭지 않은 이야기, 너무 사소하고 자잘한 의미없어 보이는 일상적인 대화들이 끝도 없을 것 처럼 늘어서 있는데다 진도도 전혀 나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장치로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나타내기 위해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가 과거의 이야기이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그래서 그 사건의 조사를 위해 각 장의 등장인물들과 주변인물들의 당시 상황을 인터뷰한 내용들이 함께 실렸지만, 마찬가지로 더욱 산만하기만 했다. 대개의 소설이 그렇듯 중반쯤 넘어가면 각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파악이 되고, 이런 저런 쓸모 없는 수다를 떨어대도 그냥 들어줄만 한 동네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빨라지다가 마지막 2/3 지점에서는 책을 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미국 최고의 여배우 니콜 키드만이 나온다기에 셀레스트 역을 맡았을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수다스런 리즈 위더스푼은 수다스런 매들린 역을 맡았을 것이다. HBO에서 11월에 시작이다. 워낙 대사가 많고, 구성 역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실제 주인공들과 목격자의 증언들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책보다 오히려 드라마 포맷에 더 잘맞는 구성을 가졌다는 느낌인데, 드라마 제작을 염두에 두고 제작사와 상의해서 책이 쓰여졌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생생한 일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깨알같은 생활 밀착형 대사를 한도 끝도 없이 많이 넣었는데 예를 들면 부잡스런 아이들이 대화에 자꾸 끼어드는 상황 같은 걸 그대로 재현한다. 전반 진행 속도도 느린데다가 대사 사이에 맥락을 흐트러트리는 산만한 상황들이 불쑥 불쑥 끼어드는 것은 책으로 읽는 것보다 잘 만들어진 드라마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지만, 리안 모리아티의 결말을 처리하는 방식은 드라마에서 재현하지 못할 성찰들을 담고 있다. 


p602

  매들린은 한 번도 네이선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남은 생애 동안 네이선은 계속해서 매들린을 미치게 할 거다. 시간이 되면 네이선은 에비게일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걸어갈 테고, 그 모습을 보면서 매들린은 계속해서 이를 갈 거다. 하지만 네이선은 여전히 가족이었다. 매들린의 아이들이 마분지에 가계도를 그릴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이름이었다.

...   매들린은 에드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동생을 위해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니를 위해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상하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같아도, 보니도 매들린에겐 가족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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