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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ㅣ 작가수업 2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9월
평점 :
오래 전에 한강 작가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했던 말들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다. 5.18 피해자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보니, 그들을 가슴에 담고, 그들에게 고스란히 자신을 투영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작가수업 시리즈의 두 번 째 책인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에서 김형수 작가는 소설가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단순히 소설이라 부르는 것, 읽히는 것, 그리고 시라 부르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예술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가 갖추고 닦아 나가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강 작가의 말 중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작중 인물이 소설가에게 하나의 살아 있는 거기 그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유기체로 느껴지는 시간들에 대한 것이었었다. 소설가는 작중인물들이 그냥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인물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도중 생생하게 살아 작가와 함께 울고 웃고 하면서 성격이 부여되는 하나의 유기체로 느낀다는 말을 김형수 작가도 언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몇 몇 소설가의 후기라든가 인터뷰 기사들을 예로 들면서 작가가 소설을 끝낸 후 작중 인물과 이별을하는 의식, 그리고 또 그 작중 인물을 이야기할 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듯 사람 취급을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들이 일부로 똥멋을 부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결국 독자에게 한 방울의 눈물은, 작가에게는 한 양동이의 눈물을 쏟아냈을만큼 작중 인물들과 그 삶을 동거동식하며 똑같이 느끼며 살아 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의 경우, 마치 소설이 끝난 후, 자기는 그 주인공이 자살했을 거다. 아니다. 살아있을거다. 뭐 이런 식으로 그 이후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좋은 소설의 경우 이것은 독자들에게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 흔히 울림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읽고 나서도 책을 덮고 나서 오랫동안까지 작중인물들의 이후 삶이 궁금해지고 그립고 보고싶어지고, 때로는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전 읽은 스토너가 바로 그 중 하나였다. 내가 리뷰를 쓰면서 주인공의 아내 이디스를 이해못하겠다고 적었는데,에 이바님이 아마도 아버지의 폭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부모의 폭력, 학대 혹은 잘못된 사랑으로 인해 아직 어떤 찬란한 앞길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무한한 가능성의 젊은 영혼들이 청춘을 만났을 때 스러지고 바스러지다가 심지어 생을 포기하는 경우까지도 흔한 세상, 분명 어떤 상황이 이디스의 현재를 감옥으로 만들었을 것이었고, 자신의 그 살아내기의 힘겨움 때문에 착한 남편마저도 희생물이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녀의 삶이 궁금하다. 소설 이전의 문제, 그녀가 감내했어야 했을 어떤 학대 같은 걸 생각하면 나중에 남편이 죽을 때 울면서 간호하던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그 착한 남편과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지옥같은 생을 보냈어야만 했을 마음의 병이 안타깝다.
《삶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1편의 제목이 《삶이 언제 예술이되는가》 였는데, 그 때 했던 이야기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공적인 것의 바탕위에서 사적인 것의 디테일들이 만들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민주화 투쟁에 몸을 담았던 사람의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문장이 주옥같았다고 느껴서 다음 편이 나오면 기필코 읽어야지 라고 기대했던 마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은, 더 잘 다듬어지고 많이 준비하고 응축된 핵심들을 주옥같은 언어로 만들어낸 강연집이다. 강연체로 되어 있는 경우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대체로 한 말 또하고 다시 정리하는 식으로 가독성을 높이는 책들이 많고 그런 방식 역시 좋아하는 편인데, 왜냐면 줄치고 나중에 다시 보지 않아도 중요한 말을 책을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 기억되는 게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얼마 전 읽은 고종석의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이고, 그렇지만 이 책은 엑기스만 정제한 느낌이다. 강연체임에도 허투른 말 하나마나한 대목 한 구절 없고 그래서 200쪽 남짓 얇은 책임에도 300쪽 이상의 내용이담 있다.
소설을 쓸 것도 아니고, 시를 쓸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책을 읽어야 하지? 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언젠가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겠나 라는 생각으로 시리즈의 첫권을 읽었고,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책을 읽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고 시를 읽을 때 자잘한 상식적인 것들만으로도 안목이 생기지만, 소설가나 시인의 근본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해했을 때에 소설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읽은 후 그 소설을 해석하는 데에도 한몫하고,또한 리뷰를 쓸 때에도 도움이 된다. 줄거리만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떨 때는 왜 어떤 작중 인물이 그토록 작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은지 몇달 혹은 몇년이 넘도록 마치 친구처럼 혹은 떠나보낸 애인처럼 그토록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건지 그 은밀한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는데, 엑기스만 발췌한 폭풍 인용문이 보너스로 제공됨
경험한 세계만 그리려고 고집했을 때 생겨나는 문제... 첫번째, 사적 감정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 속으로 끝없이 익사해요... 공주병? 왕자병? 또하나는 나의 한계로 주인공의 한계를 그어버린다는 겁니다. p47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장르의 틀'이 아니라 '감동의 틀'입니다... 우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아쉬운 현상 중의 하나가 신춘 문예 당선 작품집을 보면서 공부하여 형식이나 분량까지 거기에 맞춰서 쓰는 경우가 많다는 거에요... 낡은 제도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틀 속에 스스로 구속당하기 위해서 줄을 서는 것과 같습니다. p49
고교 백일장에 도둑처럼 끼어든 시인이, 청춘 그 자체로 시인이라 불리는 세대의 감정을 복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p56
철도는 여행의 불편이나 위험만 제거시킨 게 아니라 여행자의 지각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깊이와 음영의 소실 , 풍경으로부터 공간성의 제거, 이런 것들로 인해 산업혁명 이전까지 지각할 수 있었던 풍경들이 열차의 속도에 의해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망각합니다... 별로 두텁다 할 수 없는 어둠의 커튼 하나를 통과하면 울란바토르에 닿아요. p65
그래서 그 '아무것도 없음'을 눈이 빠지게 견디느라 유목민의 시력은 5.0이 되었습니다. p66
착시 현상에 의해서 '넘실거리는 바람결' 같은 표현들을 생각해내고 써나갈 게 아니라 각자 생애의 발자국 위에 얹힌 시월의 모습을 살펴보는 게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에요... 내 발자국을 뒤져도 '시월'이 없으면 나와 밥상을 같이 사용한 엄마, 할머니, 아버지, 형, 언니의 발자국에 얹힌 것을 다시 찾아보세요. 거기에 내가 쓸 이야기가 놓여 있을 거에요.p70
대부분의 독자는 아주 미세한 디테일 하나에서 실감을 전해받습니다. ... '세부의 비진실성은 작품 전체의 진실성에 파탄을 가지고 온다'는 거에요. p76
창작 동기가 내 안에서 솟구쳐 나와야 열정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작품의 밑바탕에는 작가의 삶이 알리바이로 깔려 있어요. p76
거창한 것보다 하찮은 것이 더 좋은 소재입니다. 매우 하찮아 보이는 계곡을 타고 들어가면 거창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 즉, 하찮아 보이는 데 ㅡㄴ 것, 이게 굉장히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p79
...우울함의 진정성이 안 느껴진단 말입니다. ... 이런 걸 사적 감정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기적 감정, 배타적 감정, 이런 건 개인적 내면에서 크게 절실히 굽이쳐도 노래가 될 수 없어요. 080
탄광 벽면에 "엄마 배고파요".. 이런 낙서 말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땅에서 뿌리 뽑힌 자들,... 근거지를 잃어야 했던 한 공동체의 슬픈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하찮아 보이는 사감들, 개인의 삶에 담긴 슬픔이나 기쁨도 어떤 것은 세상에 널리 이롭고 어떤 것은 이웃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p81
앞에서 뒤 문장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줘야 다음 문장이 들어올 수 있어요... 앞 문장이 어떤 자리를 만들어주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 작품은 독자적이고 유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인지라.... 순간에 생겨나는 감수성에서 발생... 즉 앞문장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뒤 문장에 치고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걸...'표현의 순차성'이라 해요 p97
작가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작품이 가득 들어있어요. 그 중에서 가닥 하나를 잘 잡으면 뒤 문장이 줄지어 나오는데 그 가닥이 어디 있는지는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p99
형상언어를 모르고는 살아 있는 성격을 그릴 수가 없어요... 첫 문장은 느낌의 순차성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소설 쓰는 사람들이 시집을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이 내리는 말이 어떤 식으로 오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서정적 환기력이 크지 않으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끌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p102-103
고향을 상징하는 정서적 등가물이 있어야 고향 추억에도 주봉이 있게 되고, 그래야 마음도 추억의 길을 잃지 않거든요. 사물로서의 양철북은 권터 그라스의 서사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도구에 불과해요. 그러나 양철북 때문에 이 작품은 주봉을 잃지 않아요. 주인공이 들고 있는 사물이잖아요. 주인공은 미숙아입니다. 나치가 천하를 장악하고 있던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성장이 멎어버린 인간이에요. 이렇게 성장이 멎은 자가 나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갑자기 쑥 커버립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삶의 표현의 도구가 양철북이에요.... 정서적 등가물을 찾아내기 전에는 첫 문장을 확정짓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웰컴투동막골>.. 소녀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정서적 등가물이 나비에요. 그 작품의 정서적 등가물로서의 나비 형상은 이야기의 질을 갑자기 동화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립니다.... 그 작품이 유지하고 있는 긴장의 깊이와 사회의식의 심화수준에 비추어 상징의 무게를 조금 떨어뜨렸다고 보이는 거에요. p122
인간의 의식이 집중을 우선하느냐 개괄을 우선하느냐의 문제... 집중을 우선하는 자는 구성을 중시하지만 개괄을 우선하는 자는 총체적 인식을 중시합니다... 개괄과 집중을 수행하지 않으면 독자가 객관 대상을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쓰는 자가 스스로의 문맥 속에 갇혀 길을 잃는다... 카메라에 비요한다면 앵글이 하늘 높이 떴다가 코앞에 맞닥뜨릴 만큼 이동합니다. 이 이동을 능란하게 자유자재로 하면 할수록 실감의 크기가 커집니다.... 문장을 밀고 당기는 거에요... 개괄과 집중이 잘된 소설이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입니다... 소설의 행간에서 수많은 조선의 어머니를 사유하게 됩니다. 한 번도 자기 운명의 주인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모든 집중은 훌륭한 개괄 위에서 가능합니다.... 개괄과 집중의 요령은... 문장 하나하나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p135
사적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면 남들이 징징거린다고 생각할 겁니다.... 징징거리는 것은 시가 아니다, 큰 슬픔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감정이란 지극히 공에 이르러야 '전형'이 되고 '시대적인 것'이 된다는 얘기... 이게 서정이라고 하는 어떤 정서적인 형태를 예술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장르의 운명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말입니다. '이제껏 알려져 있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삶의 새로운 측면을 밝혀내지 않은 소설은 아무리 새로운 의상을 걸쳐도 낡은 소설인 것이고...p152
도시빈민 문제로 시위를 할 때입니다. 학생들이..."도시빈민 탄압하는 X태우를 불태우자" 이랬어요....
당시 노점상들이 구호를 어떻게 외쳤냐 하면 "애태우고 속태우는 X태우를 불태우자" 이래요. 개념적인 사유에 훈련된 사람들은 4.4.조에 맞춘거고, 개념화 습관이 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생활 감정을 운율에 타운 거에요....<석탄가>라는 민요에서...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풀풀 나고요. 우리네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아니 나네" 언어공동체에 의해서 수많은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혀와 입술이 만져서 닳고 닳은 나머지 운율 상으로 거의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던 겁니다... 운율의 생명감, 이것이 개념적으로 말을 만들어서 생겨나지 않아요.p154
낯설게하기는 어떤 유파의 몫이 아니라 문학의 본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만난 것처럼 떨림과 두근거림과 생소함을 되찾게 하는 것, 이것이 낯설게하기입니다.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아리랑>의 도입부... 봄볕이 쌓일 때 그 적막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고요해서 햇살이 쌓여서 겹치는 것이 귀에 감지될 정도지요. 이런 적요는 그 속에 담긴 모든 사물을 굉장히 아름답고 조용하고 슬프게 만들어요.p161
행정언어, 법률언어, 의사들이 사용하는 언어... 이런 것들 중에 삶의 실감하고 동떨어진, 일부러 화석화된 언어를 사용해서 일상적 소통을 차단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168
생득된 형식의 저수지이자 창고인, 민요, 속담, 구비문학의 여러 전통들을 사실은 게속 읽고 써야 해요. 178
세익스피어가 구축한 그런 어문 구조들 때문에.. 능력있는 언어를 구축하게 됐어요. .. 러시아어의 능력을 확대한 이로 푸쉬킨을 꼽고 한국어의 능력을 확장시킨 이로 김소월을 꼽습니다. 시라고 하는 장르는 짧은 문장으로 복잡한 세계를 담아놓기 때문에 각기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어문구조들을 확보해서 재산으로 간직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p181
무사가 칼을 휘두르듯 언어를 다뤄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동력이... 진정성에서 나와요... 마음을 글로 옮겨 놓으면 거기서 풍겨나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독자를 속일 수 없어요 210
21세기 문화로 넘어오면 묘사의 축소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서사 자체는 계속 약화되고 묘사만 강화되어 가분수가 되고 마는 경향 때문에 묘사가 약해지면서 서술이 강해지는 쪽으로 작품이 흘러가고 있어요. 밀란 쿤데라도 농담 이후 변화 과정을 보면 불멸을 지나면서부터는 확실히 묘사 중심주의가 아니에요..... 묘사의 강화를 통해서 서사가 강화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서사의 강화로 인해 묘사를 축소해가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게 지금 소설의 흐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