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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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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어느 시골 뼛속까지 스미는 강추위 속에서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한나 렌스트룀은 낯선 남자 포르스만의 썰매에 몸을 싣고 도시로 나간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동생들과 하루하루를 버텨오던 엄마가 한 입이라도 줄여볼까 큰 딸을 대기근이 닥쳐오기 전에 타지 친척집으로 보낸 것이다. 친척을 찾지 못한 한나는 포르스만의 보호아래 그 집의 하녀가 되지만, 그것도 잠시 포르스만의 도움으로 요리사가 되어 배에 오른다. 


겨우 열여덟살때부터 스무살 남짓까지 그 혹독한 스웨덴의 시골마을에서부터 시작해서 포르스만의 하녀, 거친 뱃사람이 되기까지 결코 순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지만, 이것은 그 이후에 찾아올 불행에 비교해 본다면 서막에 불과하다. 그녀에게 하녀 시절 동료 하녀와 한 방을 쓰며 쌓은 우정, 그리고 항해사와의 짧은 사랑은 그녀의 전 인생을 통털어도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남게 될만큼 순탄치 않은 운명적 삶을 살아가게 된다. 


두 달의 짧은 선상 결혼생활은 허무하게 끝나고 한나가 죽은 남편의 유령으로부터 도망친 곳은 당시 포루투칼령이었던 모잠비크의 어느 도시. 그리고 호텔인 줄 알고 투숙한 곳은 그 도시에서 가장 큰 매음굴이었고, 그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생겼던 아기가 지워지는 사고를 경험한다. 하녀 시절 독학으로 글자를 깨우쳤고 포르스만이 버린 포르투칼어 사전을 통해 겨우 서툴게 포르투칼어를 사용할 줄 알게 된 그 말도 잘 안통하는 곳에서 그녀는, 그곳에서 철저히 혼자다. 한나가 친절한 선장과 선원들 에게서 도망친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컴컴한 암흑처럼 답답하다. 겨우 글을 깨우쳤다고는 하나, 정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세상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는 한나는 이 장님같은 상태로 홀로 남겨지는 상태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녀가 떠나온 비참하고 버림받은 과거다. 그리고 그녀가 향한 곳 역시 크게 나을 것 없어 보이는 미지의 세상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느 때보다도 더 불확실한 상태로 돌아갔다 243



우리 모두는 리스본을 출발하는 배 위의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저마다의 과거를 단단히 묶고 돌멩이를 매달아 배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요 231


그녀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검은 피부의 복종자들과 위악과 위선으로 가득한 백인들이다. 한나는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가 그녀의 양심에 대항했더라면 쉽게 흑인들의 땅에 와서 흑인들을 채찍질하고 그들을 야만인 취급하는 백인들의 사회에 동화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한나는 사실 이제까지의 삶이 흑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배우지 못했고, 남의 밑에서 일했으며, 절대적 빈곤 앞에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견디고 버티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으로 매음굴의 여자들과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흑인들에게 그녀는 눈도 마주칠 수 없고, 옆에 의자가 있어도 앉을 수 없는, 그들과는 다른 존재다. 눈을 내리깔고 언제나 복종의 몸짓으로 그녀와의 사이에 선을 긋는다. 한나 역시 그들의 문화를 언어를 관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나마 그곳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펠리시아와의 대화에서조차 둘 사이에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불통의 벽을 경험한다. 




한나는 오직 백인들만이 웃는, 그것도 때로 과장되게 크게 웃는 슬픈 대륙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보통 금세 두려움으로 번질 수 있는 염려를 위장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한나는 또한 알고 있었다. 암흑에 대한, 암흑 속에 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260



백인들이 흑인들을 짐승과 같이 취급해도 될 야만인들이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백인들을 동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매춘녀들은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 있고, 여자들은 물론 남편들조차도 백인들에게 몸을 파는 행위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유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성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인들의 반란이나 폭행 같은 큰 사건이 생길 때마다 한나는 펠리시아를 통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둘의 대화는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쪽으로 흐른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불통의 세상 속에서 그녀는 마치 시각장애자처럼 그 무엇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매음굴을 통해 모은 전재산과 가옥, 매음굴 등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하고 떠난 두번째 나이 많은 남편에게는 배에서 만나서 설레임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첫번째 남편과 같은 애틋함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가 매음굴의 여자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방식이 한나를 그곳에 계속 머물게 한 것 같다. 그녀는 모든 것을 팔아 치우고 스웨덴으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을 고용했던 포르스만보다도 더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 매음굴의 여주인으로서, 매음굴의 여자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나는 이런 종류의 희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그녀는 그 이해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흑백의 세계를 가르는 폭력에 대항한다.


에스메랄다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그녀의 속은 또한 자신에게는 미지인 채로 남는 것이 옳았다. 우리가 이렇게 만든 거야. 한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그들 자신보다는 우리에게 맞도록 바꿔 놓은 거야 282


카를로스를 왜 죽였어요? 

아 나는 펠리시아의 질문에 놀라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산 시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흑인들은 백인들이라면 가장 불가해하고 잔인한 일들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428


배에서 내려 숨을 때부터, 그녀의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 거친 운명이 안타까왔으나, 발기부전으로 결혼후 몇달이 지나도록 첫날밤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늙은 부자 남편이 죽자,  돈이 많아져서 다행이라고 여겨지면서도, 이 위선의 세계에서 누구에게 그 돈과 사업체를 모두 털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지만, 한나는 마지막까지 강했다. 외로움의 시간들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백인 남편을 죽인 흑인 이사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앵무새죽이기>를 상기시켰다. 그러나 <앵무새죽이기>에서 법정의 이슬로 사라져간 흑인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지만, 이사벨은 남편을 죽였다. 한나는 이사벨을 구명하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사업체까지 위기를 맞게 되지만, 이미 중요한 것은 돈과 백인 내의 사회적 위치 같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사벨은 왜 남편을 죽였을까. 백과 흑의 위계질서가 마치 사람-동물과 같이 선그어진 사회에서 흑인을 아내로 삼고 아이까지 자신의 아이로 동등하게 대접한 경우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백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지만, 흑인인 이사벨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 역시 같은 인간이 아닌 백인 남자의 정식 아내가 되어 백인의 문화속 일부가 된다는 것은 빗방울처럼 철저하게 흑인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고 자신의 전부를 한 남자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본부인이 아이들과 나타나자, 버림받는 치욕보다 죽이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사랑했기에 죽일 수 밖에 없는 '고결한' 영혼이었을 지 모른다. 


살 생각이 애초에 없없던 이사벨을  구명하기 위해 그녀의 침묵과 싸우고, 백인을 죽인 흑인을 구명하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가하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과 맞서고, 그로 인해 난처하게 된 흑인 여성들의 알 수 없는 반응과도 싸우는 한나에게 마지막까지 의지하던 존재는 남편이 화대로 받아 키우던 침팬지다. 


그녀는 이토록 모순투성이이며 이해하기 힘든 이  대륙에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침팬지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다 424



그녀가 쓰던 일기는 아프리카 호텔에 남겨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이 쓰인 것처럼 진행되는데, 저자 후기는 작은 세금 기록에 의지하여 쓴 허구라고 밝힌다.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어느 매음굴의 주인이 백인 여자였다는 사실로부터 하나의 작품이 탄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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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1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2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1-1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을 살해한 이유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왜 이사벨 오빠 모세스도 눈빛이 다르잖아요. 직시하는 눈빛이라고 해야하나요? 죄를 인정하고 감형에 가능성을 거느니 사형당하겠다는 의지 역시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너와 가정을 꾸리지만 내 영혼마저 지배할 순 없을 거라는 그런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이사벨이 피멘타의 이런 모습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싶더라고요. 결국 거짓말 위에 지어진 피멘타의 왕국 역시 불안정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소설에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어서 놀랐어요. 줄거리는 간단한데 무던하지만 꽉 찬 느낌? 소재나 전개방식이 참신하진 않지만 댓글부대보다 훨씬 낫더군요.

CREBBP 2016-01-12 01:30   좋아요 0 | URL
피멘타의 왕국이 모래성처럼 덧없이 허물어질 것이었음은 너무나도 자명했죠. 돌이켜본다면 말에요. 그럼에도 아이를 낳고 가정을 가지고 싶었던 피멘타는 그 허영과 위선의 끝을 피로 보았잖아요 그런데 또다시 한나가 모세스를 사랑하는 걸 보고서 그 때 배에서 아슬아슬하게 쫓겨나고 어쩌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지도 모르는 위기로 몰고가는 것을 보고 답답했어요. 요즘 하는 말로 그 뎔혼 반댈세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한나 때문이 아니라 똑같은 피해자가 모세스가 될 게 불을 보듯 뻔한 것 같아서요. 인습을 사랑으로 이길 수는 없잖아요. 피멘타도 나름 자기 벙식대로 이사벨을 사랑한 거였는데 결론은 그렇게 났고 이사벨은 우리의 가치로 봤을 땐 결국 치정극의 일부인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한나가 되지도 않을 일.. 그녀를 구하려고 애쓰는 건 굉장히 많은 질문을 주는 것 같아요. 한나의 파란만장한 인생도 이야기의 일부지만 그녀의 행동이 주는 질문들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해요. 당시 스웨덴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돼서 좋았어요. 이 소설에 비하면 댓글부대는 별 한두개 차이로 구분한다는 일이 의미없죠. 넘사벽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