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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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실어온 모래가 사구를 만들고 마을의 낡고 남루한 옛 오두막들은 조금씩 모래에 묻혀간다. 모래가 쌓이면서 마을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마을 사람들은 구청과 정부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보지만 공무원들에게 모래는 설득력있는 재난이 되지 못한다.  세상은 작은 바닷가 마을이 모래 따위에 사라져가는 위협에 주목하지 않는다. 자구책으로 쌓여가는 모래를 삽으로 퍼내지만, 자연의 힘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빈약하던가. 사람들은 사구의 구멍 속 맨 가장자리가 모래에 묻히게 되면 점차 모래가 마을을 쓸어버릴 거라는 걸 안다. 모래 언덕 맨 가장자리에 사는 사람들은 투박하고 거친 삶을 지키기 위해 밤새 모래를 푸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나른다. 


최근 읽은 소설 중 본의 아니게 재난 소설이 많았다. 모래의 여자도 모래라는 재난 속에 갇힌 어떤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일상에서 재난을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재난 속으로 찾아 들어간다. 삶의 권태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불현듯 생긴 염증도 아니다. 하찮은 직업 속의 나라는 존재 이유와 화해하기 위해 택한 취미가 그를 보다 모험적인 세계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물론 곤충채집이 그리 모험적이거나 탐험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꿈의 직업이 되어버린 '교사'라는 타이틀이 60년대 일본에선 하찮은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떠남, 잠시의 물러남은 권태를 물리는 최고의 방법이다.  


남자는 떠났고, 돌아오지 못했다. 왕복티켓을 끊었는데, 그만 편도 티켓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떠난 이유 하나는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와 같다. 손에 쥐어진 왕복 티켓이다. 우리는 돌아옴이 보장되어 있을 때 떠남에서 자유롭다. 떠났을 때 자유로운 이유는 돌아갈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구속적 현실로의 복귀라는 선택지가 쥐어진 상태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몇일의 휴가동안 그는 '강물처럼 자신들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학생들의 흐름 밑바닥에 돌맹이처럼 남은' 선생이라는 직업을 떠나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남길 새로운 곤충의 이름을 발견할 작정이었다. 자유와 명예라는 꿈을 베낭에 담아 당시 선생들로서는 이행하기 힘든 먼곳 사구로 떠난 곤충 채집 여행에서, 그는 곧 새로운 곤충이라는 포획물을 담아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예정이었다. 


어떤 상태를 지키는 것에 매몰되면 그것을 왜 지키는 지를 잊은채 지키는 것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어 버린다. 풍화와 퇴적으로 점차 모래에 조금씩 잠식당하기 시작했을 초기에 모래를 퍼내 부락을 지키는 일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래 여자는 사구의 아래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집을 해하는 반쯤 부서진 다 썪어가는 오두막에 산다. 부락 사람들은 작당을 하여 짝짓기를 시키듯 혼자사는 모래여자의 집에 외지 남자를 내려보내고 남자는 모래 언덕을 넘지 못해 갇힌다. 밤이면 습기찬 모래에 집과 집기들은 모두 썩어들어가고 부락 사람들은 밤마다 여자가 퍼내는 모래 푸대를 길어 올려간다. 모래에 갇혀 모래를 퍼내며 집을 지키고  사는 댓가로 마을 사람들은 물과 필수품을 내려보낸다. 


서걱거리는 모래 알갱이들이 끊임없이 삶을 위협하고 코와 얼굴과 입과 눈으로 쉼없이 까글거리는 곳. 1/8mm 모래 알갱이들이 들어오고, 땀과 모래가 하염없이 작은 상채기들을 남기는 그 모래 구덩이의 집에서 남자는 두고온 일상의 자유를 떠올린다. 한 때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이 생각났다. 탈출을 시도하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공범이요 카르텔을 형성한 그곳에서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그들은 망루까지 두고 사구 밑의 구덩이에서 모래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감시한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가장 취약한 곳에 사는 가구 주민들을 가두고 혼자사는 여자에게 배필까지 구해다 준 셈이다.  여러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신안군의 염전에서 심지어 10년씩이나 체불된 채 노예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과 경찰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까닭이 무엇이었겠는가. 신안군의 염전업자들도 그들처럼 침묵의 카르텔로 서로의 노예들을 서로 감시했을 것이다. 


소설 속의 사구 구멍과 그 구멍 속의 부락이란 게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 아베코보와 모래의 여자를키워드로 구글링을 해보니 흑백 영화 스틸 영상 몇 컷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아베 코보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모래의 여자는 오래 전에 영화화되어 칸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흑백이지만 사진 중에는 선정적인 작품이 많다. 두 사람이 모래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건가, 모래라는 유동의 입자들이 관능적인 육체들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에로티시즘을 영화에서라면 모를까, 책에서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모래의 여자는 집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살지만, 모래를 퍼내는 일이 삶 자체가 되어 버렸다. 다른 이유도 목적도 가치도 없다. 


삶을 지키기 위해 모래를 퍼내지만, 결국 삶 자체를 모래 퍼내기라는 아무 가치 없는 노동에 모두 묻어버리는 여자. 시간을 모래로 채우는 여자.  남자가 보기에 처음에 여자는 자신을 가둔 부락 사람들과 한패다. 자신을 가두는 일에 은밀히 동의했고, 혼자만의 노동력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모래퍼내기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 그를 가두는 존재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마을 주민들의 동맹에 의해 감금당한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모래 언덕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단지 순응할 뿐이다. 걷고 또 걸었으나 갈 곳이 없었고, 이곳에 왔으므로 이곳에서 살기 위해 집속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내고 사는 여자.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으나, 걸을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모래속의 집. 그 자유와 구속을 지키기 위해 모래가 된 여자. 


몇십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들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p87)


참으로 역설적이다. 세상에 이름 세글자를 남기고 영원히 기억되고자 떠나온 남자는 그것이 떠남이 원웨이 티켓이었음을 깨달으며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으며, 살기 위해 모래를 퍼내는 여자는 모래를 퍼내기 위해 사는 여자가 되었다. 제대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온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희생자였지만, 모래에 갇혀 아무런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묻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곳 남자가 온 바깥 세상은 오히려 모래마을을 외면하는 가해자들인 셈이었다. 


뫼비우스의 띠는 바깥쪽과 안쪽이 같다. 이 소설속에는 실제로 남자가 뫼비우스 띠라고 부르는 인물이 나온다. 여자와 남자의 대화도 그렇고 뫼비우스띠와 남자의 대화도 그렇고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서로 대화를 흉내내지만 각자 혼잣말을 차례대로 한다. 대충 읽으면 대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대화가 아니라 서로의 물음에 상관 없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소통없이도 온기만으로 함께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비루하고 답답한 현실을 보란듯 도망쳐서 도착한 곳이 출구 없는 구속이라면 그 더 답답한 모래 구멍 속에서의 탈출은 어떤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랑이 아니라면 아마도. 왕복티켓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날 평화로운 모래 퍼내기 노동 속에도 원초적 본능으로 그 대책없는 결실이란 걸 맞이하던 날, 그 새 생명처럼 사구 위쪽을 오를 수 있는 가마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탈출할 수 있는 사다리는 그에게 왕복 티켓이다. 그리 오랫동안 탈출하고 싶던 곳, 돌아가고 싶던 곳으로 나갈 수 있는 수단이 생기자, 그는 그 왕복티켓에 유효기간이 없음을 안다. 아마도 사망처리를 기다리고 있을 떠나온 곳으로의 귀향은 이제 다시 모래 여자에게로 돌아올 수 없는 원웨이 티켓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남자는, 아니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남자는 그 언제가 아무때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탈출이 더이상 절실해지지 않는다. 그곳에 머무는 일과 그곳을 떠나는 일은 동시에 자유이며 동시에 또 구속일까. 돌아간다는 것은 이제 이방인으로서 처음 모래 여자에게로 왔을 때만큼이나 서걱거리고 까끌거리는 곳일 으로의 귀향을 의미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아무 때나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을 때, 리턴 티켓을 가진 자로서 모래는 다시 자유와 낭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는 쪽을 그리워할 터이므로, 남자는 돌아갈 수 있는 세계는 그 어느 때고 돌아갈 수 있도록 간직하기로 작정한 것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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