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근대사 - 정동에서 부산까지 1887~1950
최석호.박종인.이길용 지음 / 가디언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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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웃들 중에는 골목길에 대한 향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떠올리는지 잘 모르는, 아파트에서 타고 자란  사람드리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동네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골목길에서 시작되어 골목길에서 끝났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라고 했는데, 사실 골목 친구는 초등학교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우리의 대화는 어떤 식이었냐하면 가령 이런 식이었다. 왜 너희집 두집 걸러 건너편에 계단 많던 집 거기 너희 큰집이었었나 그랬자나. 아 거기? 큰집 아니고 할머니 동생. 그리고 우리 동네 에서 오른쪽 약간 높은 지역에 있던 집에 살던 애 있자나? 응 맞어 최씨에 곱슬머리라 고집이 대단했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는 골목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뛰어놀다 지치면 누군가의 집으로 가서 놀고, 밥 때가 되면 부르러 오기도 하고. 그런 구체적인 향수를 아파트 문화에서 자란 아파트 원주민들은 어떤식으로 향유할까. 번호와 층계참과 공공 놀이터와 동네 고양이들과 학원을 오가며 들르는 PC방과 문구점 군것질 같은 것들로 대치되었겠지?

 

 

서두가 길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때에도 키낮고 움푹한 느낌의 개량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어선 골목에서 자취를 하였기 때문에(물론 지금은 아파트로 변했다) 나는 골목이라는 글자만 봐도 정겨운 느낌, 무언가 시간이 뺏어간 자국들을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 된다. 대한민국의 잊혀진 역사, 그리고 사람이야기 라는 작은 부제, 이 책은 근대의 역사를 지닌 장소를 답사하듯 방문하며, 그곳의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서울은 정동, 서촌, 동산 이렇게 네 구역의 골목들을 탐사하고, 지방은 목포, 부산, 증도 이렇게 세 곳을 단닌다.

 

책은 여행서의 느낌으로 읽었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리고 자주 근처를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한 번도 골목길 건물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비운의 근대사를 알지 못했기에, 책을 들고 책에 소개된 곳을 하나 하나 짚으며 다니고 싶어진 것이다. 도시가 품고 있는 자국들은 빠른 경제성장과 개발논리로 인해 말끔히 씻겼고, 지금도 여전히 부수고 개발되고 있다. 그 속에서 찾아낸 것들은 정동 주변과 같이 집중적으로 나름 관심있게 관리가 된 곳이거나, 동산(동대문 근처 이화동 창신동에서 성북동까지) 주변의, 무허가 판자촌이 그대로 역사가 되어 잠시 정체되어 있던 높은 지대와 그나마 강점기를 지나면서도 살아남은 주택가 서촌 등이다.

 

정동은 비운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1901년 대한제국 황실 도서관으로 건립된 중명전은 1905년 대한제국 외교관을 일본으로 넘기는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다. 이때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은 학부 대신 이완용 군부 대신 이근택, 내무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대신 권중혁. 이들이 을사오적이다, 이 때 조약을 반대한 한규설은 지하 사무실에 갇혔다. 중명전은 일제강점기때 외교 외국인 사교 클럽으로 쓰이다가 1963 년 영친왕 가족에게 반환되고 76년대에 일반인에게 팔렸다가 2003 년 이후 역사의 현장으로 관리. 2010 년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스크랜튼이 설립한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을 찾아온, 최초의 여성은 양반집 규수 가 아닌 복순 일하는 가난한 어 옆집여자 아이다. 설립 다음 해 7명으로 학생이 늘어나자 명성황후는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주었다. 한문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가 선생이었지만, 이 남자 한문 선생은 여학생을 마주 보지 못하고 뒤로 돌아 앉아 가르쳤다. 다리 가랭이를 벌리며 뜀띠기를 하는 체조는 윤리 논쟁을 일으켜 한성부 이서 중단하라는 공문을 받는 사건도 일어난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단체로 꽃놀이를 떠난다 여학원들의 화류는 500년 이래 처음있는 일이라고 했다. 어디 화류 뿐이던가 여학생들이 체계적인 단체 교육을 받는다는 일 자체가 500년만의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몇일 전 서울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오랜만에 강남역에서 신기한듯 두리번거리면서 촌티를 내는 일이 재밌었다. 고층 건물과 천편일률적인 네모난 아파트에 깔린 듯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멋진 곳이다. 서울이 가진 역사, 내 젊은 날 서울이라는 낱말이 유혹했던 꿈들과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일어났던 내 일생의 많은 일들. 정동에서 하루, 서촌에서 하루를 걷고 싶지만, 가장 먼저 시급하게 가고 싶은 곳은 이화동과 창신동 일대 내 어릴 적 살던 골목처럼 좁고 너저분하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런 낡은 시간이 새로운 시간들을 너그롭게 포용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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