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공장 베네치아 - 16세기 책의 혁명과 지식의 탄생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김정하 옮김 / 책세상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물 위에 떠있는 듯 신비한 도시의 바다물 골목을 가르는 리얄토 다리를 건너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하는 메르체리에 거리를 따라가 보자. 그 공간 속에서 50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바지와 소매없는 차림의 울긋불긋 관광객들의 모습 대신 어깨와 가슴과 바지 엉덩이를 풍선처럼 부풀린 과장된 의상들을 입은 귀족들과 여러 나라 민속 의상들을 입은 르네 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상점의 문이나 외부 진열대에는 기념품 대신 라틴어 고전과 성서, 그리스와 중세의 인문학자들이 남긴 저술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반도의 겨드랑이에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해상 무역의 패권을 거머쥐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광은 번영의 시대가 남긴 공간 속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박제된 시대의 유물이 되어 세계 각지로부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성서를 출간한 1457년 이후 처음으로 인쇄소가 등장한 때는 1465년 독일의 두 도시와 이탈리아에서였다. 이후 인쇄술은 마른 풀에 번진 불처럼 이탈리아에 급속히 확산된다. 15년 후에 유럽에 110개의 인쇄소가 있었는데 그 중 이탈리아에 50개, 독일에 30개, 프랑스에 9개였다. 베네치아는 중부 유럽에서 이주해온 인쇄공들에게 최적의 출판 환경을 갖춘 도시였다. 인근의 파도바 대학에서 지적 자원이, 부유한 상인들의 풍부한 자본이, 그리고 영민한 상인들의 뛰어난 영업활동이 출판의 활성화를 위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게 하고 있었다. 가장 뛰어난 자원은 당대의 다른 지역이나 왕국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세계 각지에서 결집한 다양한 외국인 공동체와 종교집단들의 문화적 혼용은 도시를 다양한 문자로 인쇄된 다양한 책들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출간된 모든 책의 절반 가량이 베네치아에서 인쇄되었다.(17)

16세기에 출판된 책은 낱장 형태로 판매되었으며 구매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그것을 제본하고 추가로 채식사에게 주문해 장식 문자를 그려넣었다. (20)


그 때의 책방 풍경을 들여다보자. 제본이 완료된 중고 서적들은 낱장 형태의 동일 판본에 비해 두 배의 가격이다. 책값은 필사본에 비해 1/5 가격에 불과하고 흥정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프랑크푸르트 서적 박람회에서 결정된 가격이 점차 기준이 되기 시작한다.  종이는 책 제작비의 50퍼센트를 차지했고, 인쇄 비용중 가장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활자 제작비였는데 16세기에 클로드 가라몽이 유럽의 거의 모든 인쇄업자들에게 활자를 공급할때까지 금은 세공업자들이 제작한다.  인쇄기 작동에는 조판공, 잉크공, 인쇄공 3명의 작업자가 필요했고 전문직 대우를 받은 조판공은 3년간 1/10 월급의 수련 과정이 필요했지만 높은 월급이 보장된 직업이었다. 


수많은 군소국으로 분열되어있던 당시 유럽은  각국이 저마다 다른 통화를 보유했고, 환율 변동으로 인한 가치 증발에 대처하기 위해 물물교환이 성행했다. 책은 책으로 맞교환되거나 밀가루, 포도주 기름과 교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종교재판의 광풍 속에 위기가 찾아든다. 히브리어로 출판된 수많은 책들은 불태워졌고,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은 전치사 같은 것을만 빼고 검은 잉크로 칠해졌다. 


출판의 역사는 마누치오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  르네상스 시대, 회화에 라파엘로, 조각에 미켈란젤로, 건축에 브루넬레스키가 있고, 출판계에 알도 마누치오가 있다. 150년 전에 죽은 페트라르카의 작품을 인쇄해 10만부를 판매한 최초의 베스트셀러, 최초의 문고본, 최초의 필기체 인쇄, 세미콜론의 아버지, 어퍼스트로피와 액센트 부호의 도입, 기도를 위한 책에서 여가와 즐거움을 위한 책으로의 전환, 이 모든 출판계의 획기적 업적이 마누치오의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는 <폴리필로의 꿈>은 포르노를 방불케하는 묘사, 고전적이고, 이교적이고 르네상스적인 호화로움과 사치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의 도판에는 닻과 돌고래로 디자인한 로고를 처음 넣고 자신이 출판한 책의 상징물로 사용했다. 출판업자의 이 최초의 로고는 이후 이탈리아 북부 전역으로 확산된다. 


많은 이야기가 다루어진다. 16세기 전반에 보았다는 최초의 아랍어 코란 인쇄본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과 엄청난 규모의 투자로 인쇄된 코란이 왜 정작 아랍에서는 필사본에 의해 외면받아 파산하는 과정은 한편의 영화처럼 흥미롭다. 부정확한 활자 자체와 수많은 오류, 그리고 무엇보다 성스러운 신의 언어 코란은 정성껏 필사해야 한다는 당대 아랍의 인식 등으로 인해 상업적인 판매에 실패하고 파산한 후 단 하나 남은 인쇄본이 숱한 억압을 통과하고 수세기동안 이곳 저곳을 거쳐 오늘날까지 조용한 어느 수도원에 묻혀있다가 구사일생 빛을 보게 된 스토리이다. 


거대한 다국적 출판시장이었던 베네치아가 체코어로 된 성서의 초기 두 판본을 제작한 것이나, 그리스어와 아르메니아어로 인쇄된 책들, 최초의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코란, 최초의 자국어로 인쇄된 성서 및 발칸 반도의 서로 다른 많은 고유 언어로 된 책을 출판한 이야기까지, 베네치아의 출판은 얘기거리가 넘쳐난다. 


침체되었던 베네치아 출판은 글자로 이루어진 책 뿐만 아니라, 악보와 지도 그리고 잡지와 신문 같은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다가 종교 재판으로 인한 쇠퇴 이후 정기간행물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통해 재흥되는 과정이 재미있다. 당시 뉴스라는 체제가 없던 전 유럽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가 어려웠는데, '짐을 가득 싣고 새로운 소식을 잔뜩 가져온 배가 산마르코 만에 정박하면, 리포터들은 선장이나 장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은 후에 사무실로 달려가 직접 들은 것을 손으로 써서 문밖에 붙여놓'던 것에서 시작되어 17세기 말 터키와의 전쟁 소식을 보도하면서 가제터가 확산된다.


18세기에 베네치아는 인쇄활동의 중심국이라는 지위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외국어로 쓰인 책 생산에는 중심적인 역할을 유지했고,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베네치아 출판은 처음으로 예술서에 사진을 넣고 10년동안 16권으로 완성한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이라는  역작을 탄생시키고 이미지 출판의 가장 선진적인 중심지로 만든다. 


책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다. 르네상스, 근대, 과학의 발달 그리고 혁명까지 이 모든 인류의 가파른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책의 탄생은 책의 대중화, 책의 다변화와 함께 변화의 가속에 기여했다. 책이 어떤 컨텐츠를 담느냐는 것은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반영한다. 베네치아가 아름다운 곳인 이유는 동서양의 문물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책을 통한 출판시장의 꽃을 피울 수 있을 지리적, 종교적, 역사적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표지가 너무 예뻐서 소장하고 싶어서 구입했는데, 내용 역시 오래 오래 소장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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