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그림자가 4개월의 시간만큼 그렇게 코앞 가까이 다가와 있어도 생은 여전히 나의 것이다. 삶 속에서 죽음은 다가왔다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충격이 가시고, 분노가 가시고, 우울이 가시고 난 다음에도 아직 죽음과 삶 사이에는 간격이 남아있고, 그 시간동안에는 밀물과 썰물처럼 죽음에 대한 생각이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넘나들 뿐이다. 그 일상은 참으로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이다. 남편이 벗어놓은 냄새나는 양말을 치우는 일, 지하실 수리를 하는 일, 아침 도시락을 싸는 일,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
지인의 엄마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투병을 중지하셨을 때 호스피스에 입원한 이유는 다름 아닌 남편 밥차려주기가 힘들어서라고 했다. 곧 닥칠 죽음을 기다리는 일과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이 변함없는 일상은 쌍둥이 자매처럼 평행하게 꺼져가는 생명 앞에 나란히 함께 행동한다. 배려가 지나치면 오지랍이라고 했을까. 여자를 쳇바퀴같은 일상에서 꺼내온 건 말기암 환자의 자기연민도, 절망도, 우울도 아닌 바로 남편에게 생길 빈 자리였다. 자신이 있던 텅빈 자리에 쌓여갈 남편의 냄새나는 양말짝들이었다. 사랑이 얼마나 깊으면 죽어가는 사람이 남편을 위해 새 아내를 찾아주고 싶을까. 사랑이 얼마나 없으면 자신의 빈자리에 다른 사람을 데려다 놓고 죽으려는 걸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지만, 서구인들은 조금은 정이 떨어진다. 어차피 죽을 마당에, 좀 울면 어떤가. 남들 앞에서 좀 무너져 내린들 그게 그리 자존심의 문제일까. 데이지는 그런 여자다. 혼자서 감당하고 싶고, 남들이 자신을 배려하거나 동정하는 눈으로 볼까봐 증오하고, 하긴 미국 사람들은 때때로 배려가 조금 불편하다 싶게 지나치다고 느낀 적도 가끔 있지만, 그것이 그들 문화라면, 자신도 인정하면 안될까. 남편을 물리치고 혼자서 병원가고, 여전히 집안일에 어깨에 걸린 모든 짐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잭(남편)의 학위가 자신의 암 때문에 연기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약간은 강박에 가까운 깔끔함이 그런 성격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면, 죽음 만큼이나 절망적일 것이라는 배려는 왜 못했던 걸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죽는 날까지 뭔가를 깨닫고 배운다. 망상에서 시작했던 그 이상한 남편의 아내찾기 게임을 스스로 끝내고서야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를 깨닫는 데이지를 통해, 독자도 배운다. 배려라는 것은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고, 배려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편하게 해주는 것, 기대야 할 때 기대고 붙잡고 울어야 할 때는 울어줌으로써 내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고 함께 슬퍼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 그사람의 양말을 걷어 빨래통에 넣어줄 식모비슷한 아내감을 찾는 일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거라는 사실을.
데이지가 잘못 한 건 또하나 있다. 그녀는 잭의 사랑을 의심없이 믿는다. 우리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배우자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뢰는 깊은 애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무심함과 아주 아주 약간, 그러니까 한 0.00001% 정도의 무시와 오만과, 그리고 태만에서 나온다. 데이지가 잘못한 건 남편이 미래의 아내를 현재의 아내가 골라주는대로 넙죽 잡아물 거라고 판단한 거다. 물론 잭은 양말도 아무데나 벗어넣고, 아내가 암에 걸렸어도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지는 다소 무심하고 티없는 사람이긴 하다. 아무리 순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을 아내가 구해주는 아내를 땡큐 베리 마치 유 아 쏘 카인드 하면서 받아줄 자가 어디 있을까. 아마도 데이지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남편(의 양말)을 케어한다는 미명하에 남편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이 끝에서야 그의 사랑이 자신의 생명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나서야 어떤 자각, 죽음 앞에서도 깨닫지 못할 뻔 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참으로 말도 안되는 상황인데도,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던 건 치밀하고 섬세한 여성의 심리와 친구와의 대화를 잘 묘사해내서였다. 잭이 데이지에 점점 더 무심해져가는 부분을 읽을 때에는 간접 실연이라도 당한듯 그 아린 느낌을 함께 경험했다.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 속에서 이런 상황에 나라면 하고 엉뚱하고 우울한 생각들을 스쳐보냈다. 죽음에 가까이 가면서도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