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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빛을 볼 수 없는 캄캄한 세계에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세계를 상상으로 그려본 적은 있다. 달빛도 잠든 캄캄한 날 잠에서 깼을 때 불을 켜지 않고 물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려고 손으로 벽을 더듬다 보면 잠깐이나마 그 어두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잠깐이지만, 그 경험은 빛의 소중함을 섬뜩하리만큼 강하게 주지시켜준다. 본다는 것의 감각은 인간의 모든 감각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가냘프고 여린 6세 딸에게 찾아온 실명을 상대하는 아버지는 보석 박물관의 성실한 자물쇠 장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로 아이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실제 축적과 모양을 그대로 복사한 앙증맞은 모형 도시는 소녀가 손으로 더듬어 위치를 숙지한 후, 스스로 길을 찾아 걷게 해줄 도시의 축소판이다. 축소된 도시에서 손가락으로 더듬어 위치를 파악하고 외운 곳들을 소녀는 지팡이로 짚어가며 방향을 찾고 발걸음으로 거리를 헤아려 길을 찾는다. 아버지는 이 바스라질 듯 연약한 아이가 한발 한발 내딪어 길을 찾는 모습에 가슴이 터질 듯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빛은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광선을 뿜는다. 빛의 스펙트럼 바깥에서 빨강색 보다도 파장이 긴 적외선과 보라색 보다도 파장이 짧은 자외선을 우리는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가시광선을 감각할 수 없는 세계가 장님 소녀에게 빛이 전혀 없는 세계가 아니다. 그녀는 소리를 이용해서 사물을 본다. 본다는 것의 원 목적이 단순히 눈으로 빛을 흡수하는 것만이 아닌, 빛을 망막에 투사하고 그 이미지를 전기적 신호로 바뀌어 뇌로 보내면 그것을 뇌가 해석해야 비로서 인지하는 것이기에 보는 것의 이면에는 이해라는 자극의 이해라는 차원의 인지 기능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는 것 대신 소리와 냄새와 극도로 예민하게 발달한 다른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서 주변의 사물을 인지한다면, 빛이 없는 세계에서 소녀는 일반인인 우리가 볼 수 없는 빛을 보는 셈이다.
소리가 또 다른 종류의 빛이라면, 그 빛을 보는 또다른 소년이 있다. 독일의 한 고아 소년이다. 부모의 운명처럼 시체도 찾지 못한 무너져 내린 광산의 어딘가에 묻힌 부모처럼 텅빈 눈동자로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렇게 죽어갈 운명이라면, 나치의 개가 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 될지 모른다. 고아원에서 자라며, 동네 쓰레기장을 뒤지던 아이는 동생과 함께 망가져 버린 라디오를 스스로 고쳐서 듣고 꿈을 키운다. 전쟁의 광기가 유럽 대륙에 꿈틀거리덥 무렵 공기를 가르고 멀고 먼 대륙을 가로질러 찾아온, 목소리는 아이의 인생에 하나의 반짝 반짝 빛나는 빛이 된다.
전쟁은 잔인했다. 어린 소녀는 파리를 떠나 걷고 또 걸어 생말로의 작은 할아버지 집으로 피난을 왔고, 오린 소년은 나치의 학교에서 군대 수업을 받는다. 소녀에게 빛을 선사하기 위해 생말로의 구석구석을 발걸음으로 재어 모형을 만들던 아버지는 사라졌고 독일 소년은 레지스탕스들의 라디오 송신 전파를 탐지하기 위해 나치가 점령했던 온 도시를 누빈다. 아버지를 잃은 눈먼 소녀는 용감한 레지스탕스가 되고, 나치 소년은 점차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시처럼 아름다운 문체 때문에, 평소 읽던 다른 책에 비해 두 세배는 더 걸렸다. 지치고 타락한 고아 소년에게 어둠속에 스며든 소녀의 목소리. 그리고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들었던 음악. 그 라디오 전파를 타고 소년과 소녀는 교감하고, 둘은 잠시지만 아주 잠시지만 만난다. 그토록 생고생을 해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만남이 그토록 짧을 수밖에 없었던 숙명적 만남이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비련의 주인공이 공중에 흩어지는 파편이 되어 스러지는 결말은 그것이 바로 100년이 채 안된 흉포한 역사적 사건이 한바탕 몰고 갔던 기억해야 할, 배워야 할 그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스토리는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 않고 소녀가 생말로의 작은 할아버지 집에 홀로 남아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상태에서, 아버지가 남긴 무엇을 찾기 위해 집으로 침입한 독일 원사를 피해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오래 전 송신했고, 레지스탕스의 전파로 이용했던 다락방에 숨는 장면과, 그렇게 되기 한참 전, 소녀가 눈이 멀기 전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서 지내며 전쟁을 맞이하는 시간이 교차한다. 고아 소년 역시 마찬가지로 어린시절 고아원에서 동생과 라디오를 들으며 꿈을 키우던 시절과 전쟁을 수행하는 현재가 교차되며 시간이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책 속과 바깥에서 많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 라고 말했던 어린왕자의 말이 생각난다. 눈먼 아이의 예민한 감각속에 포착되는 숨소리 냄새 촉각 등의 가능한 인지 체계 역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라디오 전파를 통한 멀고 먼 다른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정서적 교감 역시 보이지는 않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해서 스토리라인을 만들어가는 주요 장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