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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떠나지 않는 괴로움, 슬픔, 피로감이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면 신경계의 교란이 맨 먼저 시작되는 곳은 이성을 관장하는 곳이어서, 괴로운 생각들을 잊을 수 있다. 계속 많이 마시면 피질에서 시작된 가벼운 뇌의 마비는 깊은 곳까지 퍼진다. 그 중 기억 형성을 담당하는 해마가 기능을 잃었을 때, 우리는 블랙아웃을 경험한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시간. 힘겹게 살아낸 시간 숨쉬고 냄새맡고 먹고 마시고 얘기하고 울고 웃던 시간들이 통째로 도둑맞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기억 상실은 삶과 시간과 경험을 빼앗아간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자신에 대한 무지가 그렇게 만든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누구보다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이성을 잃었을 때 했던 행동이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방식의 폭력과 파렴치한 행동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때 현재 나와 기억 바깥 쪽의 나는 분리된다. 망각으로 인해 과거를 믿을 수 없는 된 나는 그 캄캄한 불신 속에 미래가 가라앉는 것을 경험한다.
무엇이 먼저였을까. 한 때는 검고 큰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 알콜 중독자가 되고, 이혼당하고, 뚱뚱해지고, 실직당하고 남의 집에 얹혀살며 매일 출근하는 척 하기 위해 런던의 악명높은 통근 기차에 몸을 싣고 아침 저녁으로 자신이 살던 집과 동네를 훔쳐보기 시작하게 된 계기 말이다. 술이 먼저였을까. 배신이 먼저였을까. 배우자의 부정과 그로 인한 결별은 그 누구에게도 참기 힘든 큰 사건이기에 술이건, 마약이건, 병에 걸리건 어떤 식으로라도 홍역처럼 치르는 고통과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독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렇게 레이철처럼 철저하게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가 떠난 것은 (피상적으로는) 레이첼의 알콜중독 때문이었다. 외모, 직장, 집, 배우자 그 모든 것을 다 가졌을 때에 가장 원했던 아기가 인공수정으로도 생기지 않게 되면서 레이첼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불임은 한 사람을 그렇게 수렁으로 빠뜨릴만큼 대재앙이었을까.
등장 인물들은 아기에 대한 서로 다른 욕망을 갖는다. 간절히 아기를 원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알콜 중독자가 되기도 하고, 와이프를 들볶기도 하지만 또다른 누구는 원치 않는 아기를 죽게 내버려두었고, 그 상처의 기억으로 인해 아기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어떤 커플이 서로에 대한 안정과 독점을 원할 때, 더욱 아기를 원한다. 두 사람의 유전자가 만나 하나의 독립체로 커가게 될 아기는 두 사람을 붙이는 본드 같은 역할을 하기에 완벽한 가정을 원할수록 더욱 아기에 대한 욕망이 커진다. 만일 자유와 일탈을 꿈꾸고 있다면 아기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기차가 신호대기에서 정차할 때마다 코앞에 보이는 남의 집은 한 때는 자신이 남편과 살았던 집의 바로 몇 집 건너 이웃이다. 그 곳에 사는 행복한 부부는 자신의 과거와 많이 닮았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자신이 살았던 집에 그대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전남편이 살고 있는 집도 보인다. 남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마음은 그들의 현재가 자신의 과거와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져버린 자신의 아늑한 삶과 일상을 그들의 삶에 투영하고 이제 자신의 과거처럼 깨져버리지 않는 그들이 자신과는 다른 미래를 향해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상상력으로 대리 만족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로 보이는 삶은 실제적인 삶과 다르다. 레이첼은 그것을 몰랐다.
자신이 매일 훔쳐보던 가정의 여자가 살해되자, 레이첼은 여러 가지 심리학적 병명에 오지랖증까지 겹쳐 자신이 목격한 것들, 자신이 술에 취했을 때 보았을 테지만 기억나지 않는 어떤 사건들을 파헤치고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술에 취해 폭력과 협박을 일삼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 쓰레기로 전락한 레이첼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녀가 하는 생각들, 그녀가 하는 행동들... 독자라고 해도 신뢰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흔한 반전의 법칙 1. 착한 사람이 범인이다. 2. 의외의 사람이 범인이다. 3. 정 없으면 엉뚱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범인이 되기도 한다. 4.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 범인이다. 반전을 기대한 독자들에겐 4번이 반전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