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한시 - 사랑의 예외적 순간을 붙잡다
이우성 지음, 원주용 옮김, 미우 그림 / arte(아르테)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폐쇄적인 조선사회에서 여러 차례 파직된 허균은 '기생과의 잠자리를 마다 않은'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공주 목사에서 파직된 후 만난 이매창만은 꺾어야 할 꽃으로 여기지 않고, 재능 있는 문인으로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며 오랜 시간동안 문학적 우정을 쌓아갔다고 전해진다. 매창을 향한 그의 시를 읽으면 기생과 바람둥이의 아련한 플라토닉 러브가 잔잔하게 전해져 온다. 10년 이상 문학적인 교류로 우정을 나누던 허균은 매창을 만난지 10년 후에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전해진다고.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딴 마음을 먹었더라면 그대와 나와의 만남이 어찌 1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으리오. 

 

바람둥이는 사랑의 덧없음을 일찌감치 눈치챘고, 때문에 둘의 우정을 위해 사랑은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이런 종류의 사랑, 아직도 설렌다. 매창이 남긴 중병을 보자. 


不是傷春病

지나가는 봄을 슬퍼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只因憶玉郞

오로지 그대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생긴 병이에요

塵世多苦累

티끌 같은 세상 괴로움만 쌓이니

孤鶴未歸情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그대 마음 때문이죠


매창의 중병이 허균을 향한 마음이었을까. 긴 우정을 위해 불꽃같은 사랑을 희생한 셈이었다. 숱한 남자들과 문학적 교류를 했던 매창이 누구를 기다리다 죽었을까. 허균은 서른 여덟살의 나이로 요절한 매창의 무덤앞에서 애계랑이라는 애도시를 짓는다. 책을 계속 읽다 보면, 그녀가 오로지 사랑한 사람은 매창과 같이 천인 출신인 유희경이었다고 나온다. 


자유연애가 허용되지 않았던 폐쇄적 시대 조선에 기생의 역할은 욕망의 분출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가무 뿐 아니라 시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특별한 기생들이 그들의 고객들과 나눈 사랑은 사회가 인정하는 정당한 관계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래서 더 애절하고 간절하다. 


아마도 내게 시대를 초월해서 가장 좋아하는 로맨틱한 시를 고르라고 한다면, 황진이의 다음 시다.


동지 섣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님 그리는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낸다는 그 표현을 나는 두고두고 감탄한다. 그것을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는다니, 황진이가 만일 그런 종류의 표현의 자유를 가진 유일한 계급의 천한 여성인 기생이 아니었다면, 양반집 마님이 되어 조신하게 곳간 열쇠를 관리하고, 세상 밖 이야기에 귀닫고 입닫고 살아야 했다면 어쩔 셈이었나. 시대가 여성에게 윤리라는 이름으로 베푼 폭력은 두고두고 용서되지 않는다.  책의 주제가 한시니만큼 이 시의 신위의 한역본이 먼저 실리고 원본이 실렸다. 한역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한자를 아는 사람들이 훈민정음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한역을 하고, 한역본을 읽었을 시대적 상황을 이런 저런 이유로 상상해본다. 


남녀간의 플라토닉 러브는 소유 대신 환상을 오래도록 유지시켜주는 대가를 돌려준다.  황진이가 작정하고 덤벼들어 유혹했으나 실패하고 섬기어 제자 사이가 되었다는 서경덕과의 사랑 역시 플라토닉으로 전해진다. 그가 짓고 황진이가 답한 시들을 보면 과연 야심한 밤에 두 남녀가 서로를 향한 본능적 욕망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속된 현대인의 눈으로 그들의 전해지는 플라토닉 러브는 더욱 믿기가 힘들어진다. 약속한 밤, 기다리다 지친 서경덕은 지는 잎 바스락거리는 바람 소리에도 제자(?)가 오는 소리일까 촉을 세웠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시가 되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황진이의 답가는 한역본을 함께 실었는데, 한글 원문과 한역본을 재역한 것을 비교하면 이렇다. 


내 언제 무신하여 임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 없이 그대를 속인 적이 있었나요

달도 기운 깊은 밤이 되도록 그대 오려는 기척 전혀 없네요.

가을 바람에 지는 낙엽 소리야.

난들 어찌 하겠어요.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아내의 부음을 듣고 쓴 배소만처상은 처절한 안타까움이 먼저 간 아내에 대한 역설적 원망으로 표현되어 있다. 급작스런 죽음은 남겨진 사람에게 처절한 슬픔과 상실감을 준다. 단지 죽었기 때문에, 죽어 죽은 사람은 그것을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상실의 슬픔을 죽은 사람에게 전한다. 더욱이 그는 유배중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 아내의 사랑하는 죽음을 지켜볼 수도 없었음을 떠나보낸 이에게 향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하다니. 나 죽고 난 후 다시 만나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사랑하리라가 아니라 생이 바뀌어 내가 죽고 그대가 천리 밖에 살아 그대에게 이 마음의 슬픔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서릿발이 내릴 것 같은 복수의 서정, 누군가가 이승을 떠났기에 남겨진 이의 참담함이 뼈속까지 전해져 오는 시였다.


이 책은 구성적으로 전체 거의 모든 페이지가 미우 작가의 일러스트 그림으로 채워져 있고, 로맨틱 한시와 풀이, 그리고 시인 이우성의 정체모를 글이 번갈아가며 교차 편집되어 있다. 한시 부분과 한시 설명 부분은 매우 신중하게 선택되었고, 한시와 원작자에 대한 설명은 간략하지만 꼭 필요한 정보는 짚어준다.  책 전체의 편집 디자인 역시 마음에 쏙 들었다. 이우성 작가의 글은 자신의 연애담을 적은 매우 평이한 문장을 문장마다 줄바꾸기로 멋을 냈지만 막상 읽어보면 시적인 정제된 표현은 안보인다.  읽다보면 맥이 끊겨 산만해진다. 줄바꾸기를 하는 목적은 줄 바꿀 때마다 쉬어서 읽으라는 소리다.  줄바꾸꾸기로 생긴 여백만큼의 긴 여운을 제공해야 한다. 문장 사이와 문장 내에서 줄바꾸기를 하려면 독자들에게 한참 쉬어 음미하고 느끼고 성찰하고 할만한 컨텐츠를 제공하는 지를 우선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 내용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후회하고 방황하고 그런 것들을 끄적끄적 낙서하듯 자유분방하게 적어놓은 젊은 시절의 일기장 같다.

 

이 세가지 종류의 다른 글들이 번갈아가며 나오기 때문에 한시와 그 설명을 읽는 것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고 산만한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고요하고 잔잔한 일러스트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마음을 만져준다. 그것을 바탕으로 고색 창연한 한시를 읽고 감상에 빠찌는 시간은 진정 행복했다. 다만 갑자기 끼어들듯 교차 편집된 에세이 부분이 산만한 것이 아쉽다.  그 부분을 빼고 한시와 그 설명 그리고 일러스트로 재구성을 했다면 만점짜리 책이었을 듯 싶다.  일러스트 그림에는 부서질 듯 고독해 보이는 홀러 선 여자가 계속 나오는데, 그것만 따로 모아 보아도 어떤 스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읽고 감상하는 데 집중하느라 유의해서 보지 못했다. 이부분은 다시 봐야겠다. 


금각이라는 사람의 시

楊柳詞(양류사)



送君心逐狂風(송군심축광풍거)

그대 보낸 후 내 마음 광풍처럼 그대를 뒤쫓다

去掛江頭綠柳枝(거괘강두녹류지)

강나루의 푸른 버들가지에 걸리었네

綠柳能知心裏事(녹류능지심리사)

푸른 버들이여, 내 마음 잘 안다면

煙絲强欲繫郞衣(연사강욕계랑의)

실버들로 떠나는 내 임의 옷소매 잡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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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1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이우성의 정체모를 글ㅋㅋ 한시를 읽으면 옛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들은 동서고금 비슷한가봐요 황진이 시의 표현은 정말 최고.. 이효석의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와 더불어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에요

CREBBP 2015-07-1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순화해서 쓰긴 했지만 정말 짜증났어요. 읽어보면 별 내용도 아니고 그냥 지 연해할 때 얘기들인데 유치해요. 아마도 줄바꿔쓰기땜에 계속 거슬린 건지 모르겠지만 따로 읽었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격 떨어지게 한시랑 섞어 놓다니..젊은 시인인 모양인데 시인의 에세이는 웬만하면 신뢰가 가는데 쩝..

에이바 2015-07-17 23:27   좋아요 1 | URL
저도 시집에 시만 있는게 좋아요 솔직히 코멘트 있으면 시 감상에 방해만 되고.. 뒤로 미뤄버리거나 하는게 좋아요 대부분은 짧은 단상에 불과한거라..

CREBBP 2015-07-17 23:30   좋아요 0 | URL
시에 대한 코멘트하면 이해를 하겠는데 완전히 관계없는 한마디로 자기 얘기.. 아 나만 그렇게 느껐는지 다른 사람 의견도 궁금해요. 정말 왜 그런 글을 넣었는지 의아했거든요. 문학적으로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시랑 개인 낙서같은 글둘을 왜 섞냐구요.

에이바 2015-07-17 23:36   좋아요 1 | URL
한시가 어렵다는 편견불식을 위해서였을까요? 시인이 선정한 한시였나? 차라리 작품 배경설명을 넣던가 하지.. 저도 좀 의아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