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담 보바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평점 :
삶의 권태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점에서 생긴다. 애초 환상이 없었다면 어떤 환경이었다고 해도 현실은 그런대로 적응해서 살 만했을 것이고, 또 그 현실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바쳐지는 고단한 노동을 짊어지고 있다면 더더욱 환상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19C 프랑스, 농부의 딸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낭만적인 연애소설들을 책으로 접한 엠마는 애석하게도 자신이 처한 현실의 삶보다는 몽상에 가까운 화려하고 감미로운 연애를 꿈꾸며 불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끝내 만족되지 않는 욕망과 바꾸고 파멸해가는 길을 택한 여성이다.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통속적이고 진부한 불륜 스토리일 수도 있는 이 소설이 왜 문학적으로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은 스토리 그 자체가 작품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 깊이 내제되어 있는 욕망의 본질을 만난다. 플로베르가 바라본 엠마의 세계에는 시대적, 사회적, 심리학적 통찰이 깊이 배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철학자 쥘 드 고티에는 <보바리즘, 플로베르 작품 속의 심리학>에서 보바리즘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냈고, 이후 ‘보바리즘’은 일반명사가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성향'이다.
수녀원에서 꿈꾸었던 몽상이 도착한 곳은 다시 자신이 자란 농가. 사별로 인해 때맞춰 늙은 과부와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의사의 눈에 들어 빠져 나오듯 결혼을 했으나, 결혼이 그녀를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만큼 그녀 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없다. 무미건조한 시골의사와의 결혼 생활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병들게 할만큼 권태롭다. 아기는 유모가 맡았고, 집안 일은 하녀가 한다.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많지만 가족과 주변에 자신의 고상한 지적 예술적 수준을 따라가고 교감을 나눌 상대는 없다. 몸에 두르고 집안을 치장하고 향기를 담을 물질적 욕망을 쫓지만, 한심한 의사 남편은 하마터면 그녀가 남편으로서 존경할 만한 가치와 희망을 걸 뻔 했던 이웃의 안짱 다리 수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위기에 몰린다.
모든 여자가 소설 속 왕자처럼 자신의 이상을 만족시켜줄 멋있고 근사한 남성을 남편으로 가질 수는 없다. 성실함의 대가는 경제적 안락함뿐이어서, 짜릿한 욕망의 충족을 보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성실함은 성적 매력의 부재라는 남편으로서의 무능을 보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엠마의 애정 행각은 그 어느 독자에게도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일부일처제의 남녀 중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배반하는 일에 그 누구도 그리 너그럽지 못하다. 아무리 자유의 기치가 우리 머리 위의 애드벌룬처럼 둥둥 떠다니는 21세기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독자들에겐 평온하고 안온한 일상 중 운명처럼 다가와 삶을 뒤흔들어 놓는 사랑이 작품 속 동경하는 사랑의 공식이지, 권태의 늪에서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한 유부녀의 파멸을 향한 불륜이 공감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를 둘러싼 윤리의 벽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비련의 주인공은 외면받고 소외된다. 두꺼운 책을 통해 고스란히 속을 보여주었건만 허락되지 않은 것, 금기시된 것을 탐한 것에 대한 응징, 외면, 그리고 소외, 그것이 주인공 혼자 영원히 감당해야 할 몫처럼 보인다.
이왕 엠마의 허영을 따라 읽는 독자가 되었으니, 우리도 한 번 허울좋은 윤리의 가면을 벗어보면 어떨까. 삶의 실존적 고단함을 알지 못하는, 책에서 본 호화롭고 허황된 세상과 정직하고 누추한 현실과의 본질적 갭 사이에서 엠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일생동안 교육과 사회적 활동을 통해 축적해온 보편적 삶의 가치와 윤리들을 벗어 던지고 우리 자신, 고유의 은밀한 자신의 내면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보바리즘을 찾아보면 어떨까. 인간은 누구나 그 갖지 못할 가상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가. 우리는 때때로 아직도 가끔은 이런 누추한 현실이, 선악과를 잘못 따먹은 것 따위의 자잘한 죄에 대한 대가로 잘못 내던져진 벌이며, 내가 있어야 할 나의 자리는 저 먼 곳 꿈같이 아늑한 천상의 어느 곳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는 동안 이제 몸과 마음은 늙어 이 구차스런 현실이 내가 사는 동안 머무는 진짜 현실이란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들을 존재하지 않는 다른 나 자신을 찾아 헤매었던가.
우리는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우리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큰 꿈을 가지라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그런데 당시 여자로서 무엇을 꿈꿀 수 있나. 소망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큰 돈을 직접 버는 것도, 명예를 쟁취하는 것도, 정치적 야망을 가지는 것도, 자아를 실현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인간의 욕망의 갈 곳 없는 공허함이 있다. 목적없는 인간이,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 인간이, 현재 나에게 주어진 누추한 현실에 단지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안정된 삶이 최고의 가치이고 그것이 충족된 현대의 '마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으로 '더이상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 공허한 삶'을 위안받는가. 명품백 쇼핑, 피부관리, 자녀교육과 내조처럼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무언가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쫓는 행위들 속에는 엠마가 가졌던 권태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완벽한 자아실현을 거둔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그것을 위해 희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한처럼 깊고 어두운 구석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당시 여자의 삶이라면 무엇을 꿈꿀 수 있었을까. 왕자를 기다리는 숲 속 잠자는 공주나 재투성이 아가씨 같은 요행적이고 운명적 기다림 말고 말이다.
그 숱한 남녀들 중 어찌 인연이 닿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서로 만나 결혼이라는 굴레 속에서 서로에게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 스스로가 자연의 생물로서 주어진 자유를 반납한 어리석은 제도일 수도 있다. 나는 우리 모두 반, 내가 속한 집단에서 제일 잘나가는 암컷이거나 수컷인 적이 있었던가? 가장 예쁘고, 가장 힘세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우아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개체 말이다. 한 둘의 우월한 개체만이 경쟁에서 선택되는 것보다는 조금 못난 남자도 여자도 평생 일부일처제를 한다는 규칙에 대한 보답으로 평생 짝짓기를 보장받는다면 진화적 종의 다양성에서 볼 때 더 유리하게 작용했었을 수도 있다. 결국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일부일처제라는 안타까운 사회적 관습은 가장 잘나가지는 않는 다수의 이기심을 구겨 넣은 인위적인 규칙은 아닐까. 어쨌든 외모도, 두뇌도, 힘도 모든 것이 그저 중간쯤 되는 모든 사람들도 두루두루 한 명씩 일단 콩깍지 씌운 자신의 한 번만 찾으면 평생 힘 안들이고 경쟁하지 않아도 같이 의지하고 살수 있게 되었으니, 엠마처럼 여러 남자가 필요한 불행한 여성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신경외과에서 정신병을 확인하는 세 가지 요소에 자기자각, 공간자각, 시간자각이 있고, 추가로 현상자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두뇌와의 대화> 페이지 및 내용 확인요망). 어찌 보면 마담 보바리는 자신을 기사로 잘못 착각하는 돈키호테의 또 다른 버전일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한다. 현대 의학에서 자기자각이라는 정신적 요소 하나에 대해 살짝 결핍을 가진 것이다. 스스로 제대로 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현실 속의 자신을 엠마는 저주하고 외면한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뿐만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과 남편의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 모든 것을 서늘한 망각의 강물에 흘려보낸다. 심지어는 따분하고 권태로웠던 과거 농가와 수녀원 기숙사에서의 시간마저 미화하며 그녀 삶에서 현재를 쫓아내 버린다. 현재의 삶, 그것은 지겹고, 싫증나고, 권태롭고, 짜증나서 떨쳐버리고 싶은, 도망가 버리고 싶은 현실일 뿐이다.
돈키호테나 정신병자처럼 정체성 자체를 완전히 상실한 채 정신병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늘 현실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떠돈다. 현재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이 답답해 빠진 시골구석이 아니라 파리의 호화로운 무도회장이었어야 했고,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은 뚱뚱하고 아무데서나 졸고, 몰취향적인 현재의 남편이 아니고 지적이고 감정적 교감이 가능한 귀족이었어야 했다. 낭만 소설 속 주인공이 되지 못한 그녀는 병이 들고 시름시름 앓아 죽을 것 같지만, 그녀가 비로소 그 환상적 사랑에 매몰되었을 때마저, 그녀가 행복한 것 같지는 않다.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그녀는 종종 로돌프와 레옹을 직접 눈앞에 보면 그 명상의 쾌락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낀다. 몰래 만나는 불륜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머리카락이나 상징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상대를 질리게 만든다. 그녀의 욕망은 마치 중독 같은 것이어서 일시적 쾌락은 더 큰 욕구를 부르고, 그것은 절대로 만족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죽을 때까지 약물을 하고, 술을 마시며, 도박에 모든 것을 거는 중독자들처럼 그녀는 파멸할 때까지 대담무쌍한 밀회와 욕망을 향해 거침없는 행보와 요구를 계속한다. 다른 중독들과는 달리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녀의 그러한 물불 안가리는 욕망의 끝이 어떠한 비참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누구든 예측 가능하다. 행복해야 할 '사랑'을 하면서도, 정염에 휩싸여 불안하고 초조하고 비참하고 권태로운 결혼 제도 속에 속박되고, 물질적 욕망으로 보상받으려는 듯한 낭비와 무절제적인 생활의 끝은 뻔하다.
엠마가 남편에게 위임장을 남겨받아 서서히 파산해 가는 과정은 마치 골인 지점을 표시해두고 그곳까지만 힘껏 달려 스스로 파멸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현실적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와 미래를 미화하고 환기하지만, 그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전혀 없다. 소설의 중반 쯤에서, 나는 비소를 둔 약국의 다락방 장면이 나올 때 그 비소가 이야기의 전환에 큰 역할을 하게 될 암시를 받았다. 그러나, 김화영님도 작품 설명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 시점의 전환과 의도적 사용은 전체 작품을 이해하는 큰 장치다.
독자는 그 비소에 주목하지만, 엠마의 시점에서 그것을 주목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음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로돌프에게 거절당한 후, 갑작스레 음독을 결정한 마음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 언제부터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그 비소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이 가장 두려웠던 건지. 그녀는 어음을 연장시켜주면 어떻게 해서든 남편을 더 속여먹일 궁리를 할 작정이었다. 교활하게도, 약국 다락방 키를 가진 사환인 쥐스탱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엠마는 이미 그 어린 사환의 순애보 같은 사랑을 이용해 음독에 사용될 비소를 취하는 사악한 이기심을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미래도 계산하지 않은 채 애인선물과 자질구레한 사치품들로 유혹하여 그녀의 재산을 갈취하고자 하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이용당하는 어리숙한 엠마와는 대조적이다. 생의 끝에 도달해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몰려 있으며, 어떻게 해야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아는 똑똑하고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엠마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결심하기 전, 어음이 부도나기 바로 전 그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어딜 향해 가고 있는 지에 대한 인지 역시 충분히 하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파산이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비참한 위치로 바꾸어 놓을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이었기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탐탁지 않다. 그런 자기자각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 마지막 파국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왜 죽었을까. 나는 그녀가 자신의 생의 어느 지점에 깃발을 꽂아 놓았다고 생각한다. 인생 종착역에 인위적으로 세운 깃발 앞 까지만 가고 거기서 더는 공허한 삶을 계속하지 않으리라. 그것이 화려한 삶을 꿈꾸었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구차한 현실을 외면하고 그 허황된 가짜 인생을 살면서 세운 종착역이었을 것이다. 오래 전, 어떤 영화에서 본 장면이다. 어떤 교수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60이 되면 어떨 것 같냐고. 푸르른 청춘이 낡은 것들을 빨아들일 듯 공기를 가르고 젊은 여대상은 말한다. 전 60세까지 살지 않을 거에요. 그 여대생은 내 기억에 아마도 30, 더 많으면 40 정도에 죽을 거라고 했다. 청춘이 가득한 젊음의 어떤 시기에 늙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늙음이라면 거부하겠다는 청춘의 한 마디는 젊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미래를 가졌다는 것, 그것이 전부인, 그 이상을 살아보지 않은 청춘에게만 공감된다. 허영과 사치와 사랑과 우아함이 최고 가치인 한 불행한 개인에게, 그것이 없는 삶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살아보면 어쩌면 다른 삶의 가치를 발견했을지도 모를 깃발 바깥의 세상, 그 이후에 있는 시간들을 부정하고 준비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