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와의 대화 - 하버드 의대교수 앨런 로퍼의
앨런 로퍼 & 브라이언 버렐 지음, 이유경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유부녀와 유부남을 태운 2인승 비행기에서 경착륙을 하자, 여자는 응급대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집이 어디인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불륜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이 여자는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에서 본 기억상실증을 흉내냈지만, 잘 해내지 못했다.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의 두번째 모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여왕을 거꾸로 사는 것으로 상상했다. 의아해하는 앨리스에게 여왕은 거꾸로 사는 것의 이점은 기억이 양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기억이 뒤로만 작용한다면 그건 형편없는 기억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 속에서 여왕이 옳다고 말한다. ‘기억은 앞으로 또 뒤로,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선행기억은 앞으로 작용하며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이고, 역행기억은 뒤로 작용하며 과거의 기억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고,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도 잃는다(p112)’. 비행기 추락 후, 기억 상실증을 연기하는 그녀는 자기 이름은 몰라도, 나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자기 인식이 가능했고, 그로 인해 로퍼 박사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한 말이 산통을 깨고 만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에서 나오는 선택적 기억상실증은 의학적인 설명이 더 필요한 듯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심폐소생술에 의해 간신히 뇌손상을 입은채 살아난 한 환자는 중뇌 측두엽에 혈류가 낮아 생긴 역행 및 선행 기억상실로 영구적인 기억상실인 코르사코프 증후군에 맞닥뜨렸다. 그에게 시간은 영원히 1960년이었고, 30초 이상 기억을 간직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이 작화증을 함께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코르사코프 증후군 환자들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기억의 간극을 메워서 보상한다. 


넘어져서 실려온 한 환자는 진탕성 기억상실을 보였다. 환자의 의식은 상실되지 않았지만 그 이전 해의 기억 대부분과 과거 30년의 기억 중 일부가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살아온 과거를 정확하게 이야기했으나 최근 그녀의 가족이 죽은 사실과 대부분의 1년전의 기억을 잃었다. 그녀 역시 30초 이상 의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을 가르쳐 주면 매번 똑같이 대답할 뿐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운전 중 원형 로터리에 빠지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해 영원히 그곳을 돌다가 경찰이 주목한 후에야 그곳을 빠져나온다. 


이 책을 쓴 앨런 로퍼 교수는 현재는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이며 보스톤에 위치한 브리검 여성병원의 신경의학부 최고 임상의이다. 영화배우 마이클 J 폭스의 알츠하이머 치료를 담당한 의사이기도 한 그가 낸 책은, 임상 기록에 가까운 책이다. 물론 그의 전공이 신경의학인 관계로 두뇌와 관련된 질병을 가진 환자들의 치료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제목이 암시하는 <두뇌와의 대화>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현장의 올리버 색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제목에서 올리버 색스와 비슷한 톤의 목소리를 기대했다면 기대와는 다르다. 미국 드라마 ER이나 닥터 하우스(House M.D)에 더 가깝다. 병원은 항상 응급 환자들로 시끌 벅적하고 시간을 다투는 처치와 순간적이고도 직관적인 판단에 의해 생명까지도 좌우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룬다. 모든 병원의 의사가 한가하게 한 개인의 모든 사적인 영역을 조사하고 탐구하여 위대한 통찰에 이를 수는 없는 일이다. 많은 수의 환자를 미국의 의료제도 내에서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하여 가장 최적의 치료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 임상의의 목표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앨런 로퍼 교수가 평생을 통해 보아온 환자들 최근의 환자 혹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환자들에 신경의학에 관련된 많은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즉, 환자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특정 질병을 가진 많은 환자들 중의 하나로서, 질병 자체와 그 치료에 관련된 병원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신경과의 수많은 질병들을 만난다. 그것은 뇌가 하는 일, ‘언어와 감각과 감정, 걷는 것과 넘어지는 것, 약함과 떨림, 신체 동작의 조화, 기억력과 정신능력, 발달지연, 불안과 고통, 스트레스, 심지어는 죽음(p15)’과도 연결되는 수많은 이상 증상들이다.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과 그와 수반되는 모든 신체적 활동이 뇌와 연결된 신경들이 작용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가 다루는 임상의 범위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가 속한 브리검 여성병원에 실려오는 환자들에 대해 의사들은 환자들의 증상 몇가지 인터뷰들을 통해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질병의 원인을 추리하고 빠른 판단으로 어떤 처치를 내릴지, 또 어떤 추가 검사를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결정 과정에는 물론 필연적으로 실수가 뒤따른다. 의사들은 그러한 실수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갑자기 다리에서 시작된 마비가 몇 일만에 온몸으로 퍼지는 경험으로 응급실에 실려온 코너웨이의 가장 뚜렷한 증상은 갈랑바레증후군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그에 따른 처치를 하고 있었지만, 열이 있고 백혈구가 높다는 사실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MRI 사진의 위쪽에 위치한 지름 3밀리미터의 작은 점들을 주목하지 못한 채 진짜 질병인 척수경막외농양의 진단을 놓쳤고, 그는 몇일 만에 죽었다. 어차피 알았어도 살지 못한 환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 그것은 변명처럼 들렸다. 이런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인 이상 비일비재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의사에게 바라는 것, 즉 공개적으로 실수를 인정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알지만,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p313)


레지던트들이 병원에서 의료 행위를 하면서 가장 마지막에 익히는 기술은 많은 면에서 중요하고 또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환자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실행력이다. 전국 최고의 손 수술 전문의가 새벽 2시에 와서 환자의 손을 접합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환자가 시력을 잃기 전에 시신경에서 종양을 제거해야 한다면 전화를 걸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p316).


신경과 의사로서 현장에서 느끼는 것들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는 이 책은, 간호학이나 의학 혹은 병원이나 요양 시설 등의 의료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도서라고 보여진다. House MD가 질병을 추적할 때 수많은 가능성에서 하나의 질병으로 마치 범인을 추적하듯 추적해나가는 것처럼, 실제 의료진들은 병원에 도착한 수많은 환자들의 증상을 바탕으로 몇가지 질문과 몇 가지 검사만으로 빠르게 어떤 추가 검사가 필요한지, 어떤 처치가 필요한지를 결정한다. 이 결정과정 중에서 잘못된 진술, 잘못된 판단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기도 하고, 환자에게 영원한 장애를 갖게 하기도 한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환자인 개인에게 의사는 목숨을 맡긴 신이다. 때로 잔인하기도 한 의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이 책은 의료 현장에서 의사의 결정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가를 잘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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