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
김성재 지음, 백대승 그림 / 현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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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듣거나 읽거나 보거나 했던 고전 이야기들은 어디서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 조금 조금씩 다른 플롯을 가진다. 기억하고 있던 내용이랑 다른 부분을 만날 때, 원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하곤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 '원래' 라는 말이 틀리다. 설화가 전승되어 가는 과정 혹은 작자미상의 어떤 창작자에 의해 특정 시점에 쓰여졌다 하더라도, 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에 따라 구전이나 필사의 과정에서 가감되어 자연스럽게 변형되는 것이 우리의 고전 이야기들이 가진 특징이다. 이야기는 판소리를 통해 소리와 음악으로 융합되어 대를 이어 전승되었다. 


그러니까 토끼전, 심청전, 흥부전 같은 판소리 계열의 소설은 구전을 통해 전달되다가, 판소리 사설로 채택되고, 이 과정에서 판소리 대본을 기록하는 창본의 과정을 거쳐 소설화되는데, 이렇게 마지막에 채택된 대본이라 하더라도 여러사람에게 전해 전해 필사되면서 많은 활자본의 이본이 생기게 된다. 토끼전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본이 존재하는 소설이라고 한다. 현재 전하는 이본만 70여 종이나 되며 제목도 다양해서, 벌토가, 수궁가 처럼 ~가로 끝나는 판소리 창본에 가까운 이본들이 있고, 별주부전, 토선생전, 토생전 들과 같이 소설화된 작품들도 있고, 한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토끼전이 이본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구토설화(토끼와 거북 이야기)가 그 모티브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설화는 거북이 토끼를 태우고 바다 용궁을 향하는 중에 사실을 털어넣고, 이 때 바로 꾀를 써서 되돌아가는 매우 짧은 내용이다. 이것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그 숱한 이야기들이 보태지고 변형되어 오늘날 웃기고 재미있는 컨텐츠로 발전된 걸 보면, 진정 이야기의 주인은 길고 긴 시간과 그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환경과 생각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여러 이본 중 조선 말기의 판소리 이론가이며 개작자인 신재효(1812~1882)가 정리한 판소리 대본을 거의 활자화한 '완판본' <토별가>를 토대로한 글로, 원문의 내용을 충실히 했다고 한다. 


오래전에 내가 알고 있던 토끼전의 결말은 토끼가 간을 가지러 간다며 후루룩 내빼버리고, 자라 혼자 황망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거였다고 기억하는데, 완판본을 기준으로 한 이 책은, 두루두루 행복하게 끝난다. 약아빠진 토끼가, 간을 가지러 간다고 온갖 감언이설로 용왕의 모든 신하들과 용왕을 속여먹고 실컷 대접을 받은 후 뭍으로 돌아와서는 간의 진실을 밝히며 큰소리 뻥뻥치고는 똥을 싸서 자라 등껍질위에 올려놓고 돌려보내고 용왕은 토끼 말대로 토끼똥을 먹고 병이 낳았다는 훈훈한 결말이다. 


"... 네 용왕의 안색을 보니 두 눈이 흐릿한 것이 얼굴에 열이 뻗쳤더라. 내 똥을 먹으면 병이 나을 테니 갖다가 먹여라."


말을 마치기 무섭게 탄약 같은 똥을 많이도 싸 댄다. 그것을 칡 이파리에 단단히 싸서 자라 등에 올려놓고 칡넝쿨로 감아 주니 자라가 짊어지고 수궁으로 돌아갔다. - 101


고전 읽기의 참 맛은 옛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옛말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라는 말을 쓰면서 옛날 사람들은 정말로 개똥을 약으로 썼을까 궁금했는데, 이쯤하면 토끼똥을 민간에서 약으로 썼다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용궁이 배경이다 보니, 양반과 지배관료들에 대한 해학과 풍자가 넘쳐난다. 주부라는 매우 낮은 등급의 벼슬을 하는 자라가, 토끼 간을 구해오겠다고 하는 과정에서 높은 벼슬의 신하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잘난척들만 하고, 간을 구하겠다고 자처해서 나선 자라 역시, 토끼를 만나자 서로 앞다투어 되고 말고 문자들을 쓴다. 시대를 막론하고 조금 알게 되면 그 아는 걸 드러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리가 토끼전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그냥 평범하게 "어디서 오신 분이시오?" 이러면 될 것을 유실한 체하느라고 굳이 어려운 문자를 써서 "객종하처래오"라고 묻는다.

자라가... 자기도 일부러 문자를 섞어서 대답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역객서역객, 동쪽으로 가도 나그네, 서쪽으로 가도 나그네 신세니 정해진 거처가 없소이다.."



토끼가 신이 나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불쑥불쑥 물어 대고 자라는 어디서 주워들은 문자를 있는 대로 주워섬긴다. 

"그 옛날 '봉황대에 봉황이 놀더니 봉황 떠나대는 비고 강물만 예같이 흐른다 라고 노래한 봉황대이다.

봉황대는 누대 이름인데.... 그 봉황대가 이 바다 속에 있을 리가 없지만 자라는 아무렇게나 갖다 붙여서 설명하고 토끼도 그런가보다 하고 따지지 않는다. - 95


환경 오염은 개화기 이후 공업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생긴 용어인줄 알았는데, 그 오래된 옛날부터 바닷물이 더러워지는 것에 대한 공론이 있었는지, 자라는 육지에서 만난 동족에게 바다 소식을 전하며 해마다 바닷물이 더러워져 물속의 종족이 아주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다는 말을 전한다. 물론 이 말은 토끼를 만나기 위해 수궁에 궁전을 새로 지을 터를 물색하기 위한 핑계이긴 하나, 바닷물이 해마다 더러워진다는 생각을 해냈다는 것은, 당시에도 바닷물이 더러워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개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과는 조금 다른 코믹적 코드라 어느 정도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지만, 해학적 요소가 풍부해서 픽픽 웃음이 나오는 부분이 많았고, 특히 용궁의 회의 장면과 토끼를 만나기 위해 참석한 동물들의 회의 장면은 탁상공론에 빠진 지배계급의 어리석은 모습을 그대로 비유하고 있어 당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매우 통쾌했을 듯싶다. 간을 꺼내 나무에 걸어두고 왔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시침 뚝 떼고 마치 사실처럼 설득시키는 과정은 너무나도 정교해서, 수궁의 물고기들이 안믿을 재간이 없도록 설득력을 가진 것도 주목할만하다. 우리의 전승 소설의 매력을 찾아서 기회되는 대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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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4-2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물이 더러워진다는 표현이 있어요? 신기하네요. 청계천은 그 당시에도 오염문제가 심각할 때가 있었는데 바다물 오염이라니. 밑줄긋기 부탁합니다 ㅋ

CREBBP 2015-04-23 13:10   좋아요 1 | URL
몇마디 없어요. 토끼를 찾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데, 내가 토끼를 좀 만나야 된다, 토끼 간을 빼먹어야 하기 땜에 이렇게 말할 수 없으니까, 수궁을 짓는데 토끼눈이 밝다 해서 좀 데려가려고 한다. 왜 수궁을 새로 짓느냐, 바닷물이 날로 더러워져서 다른 데로 옮겨 짓는다 뭐 그런 뜻. 오염에 대해서는 길게 없고, 그냥 바닷물이 날로 더러워져간다. 그소리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