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신화여행 -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김남수 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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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는 동아시아와 아시아 신화에 낯설다. 매우 낯설다. 심지어 우리나라 신화조차도 낯설다. 많은 수의 우리들에게는 우리와 더 닮고 더 가까운 곳의 신화보다는 멀고 먼 지구 반대편 그리스 로마신화가 더 스토리텔링이 풍부하고, 초창기 인류 문화의 화려한 유산을 담고 있다고 느껴진다. 모르는 게 자랑이 아니지만 적어도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읽혀왔던 신화는 수십권의 만화로 드넓게 펼쳐진 그리스 로마신화다. 그렇게 서구 중심의 인식 속에서 살아왔다. 신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 그 매력에 빠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으나, 어떤 한 민족에게 있어 신화가 가지는 속성을 이해하고, 어떤 생각의 바탕위에서 그러한 신화들이 탄생되어 전승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더 자극적인 스토리텔링에 묻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리는 건 더욱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렇다. 대다수의 우리에게 동양의 신화는 낯설다. 인도의 마하바라타, 몽골의 게세르는 물론이거니와 고대 수메르·바빌로니아와 동양의 여러 민족 서사시인 길가메쉬조차도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방대한 스토리와 신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분명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다른 많은 민족의 신화도 동등한 가치로 전해지고 읽혀져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 읽게 된 책이다.  서유럽 신화가 아닌 많은 민족의 신화를 화려한 화보와 함께 설명과 함께 강의의 형태로 펼쳐놓은 500쪽 가까이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세계신화여행>이다.  보통 본문에 책 제목을 언급할 때, 부제를 같이 언급하지 않는 편인데, 나는 굳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한 번 더 타이핑하고 싶다. 책을 덮고 휴 하고 한숨을 쉬었을 때, 나의 머리속에 그 이야기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들의 이야기, 한 민족의 정체성이 시대와 시대를 거듭해가며 변화해온 그 맥을 타고 근근히 이어져온 이야기가 우리들 속에서, 그리고 이 책의 신화를 창조한 민족들의 마음 속, 정체성의 늪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신화 라고 하면 글자 탄생 이전에, 혹은 글자가 있더라도, 종이와 펜이 흔하지 않고, 문맹율이 높던 시대에 탄생해서 구전을 통해 면면히 이어가다가 문자의 탄생과 기록 문화가 확산되던 중 어느 날 더이상 변형되지 않고 소실되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진 상태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어떤 한 문화권의 태초의 신화가 구두 전승 과정 중 드넓은 지형을 따라 구석구석 여러 민족으로 흘러들어 저마다 다른 버전, 다른 의미로 변형을 거듭하며 재탄생했을 가능성도 크다. 


글자 문명 이전 시대에 그들은 어떻게 신화를 이어갔을까. 집단 기억의 비밀은 노래다.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떠올리면 신화의 내용들이 어떻게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대대손손 수천년의 시간을 가르며 생명처럼 끊기지 않고 성장과 쇠퇴를 경험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다. 최근 읽고 있는 이집트의 노벨상 수상 작가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동네 아이들>에 이야기꾼이 선조들의 기억을 노래에 담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면들은 내게 신화의 기원에 대한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흥부전과 심청전 같은 판소리들이 3~6시간 동안 긴 이야기를 음악에 맞춰하는 것을 통해 대략 어떤 것이었을까가 상상가능한 서사시와 음악의 결합은 신화의 전승에 있어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글이 아닌 말로의 전승은 그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데 있다. 말로 박힌 이야기는 인쇄되는 순간 이야기의 생명은 끝난다.  시시각각 변하는 공간과 시간의 특수성들을 반영하여 보태고 덜어지고 풍성해지는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의 탄생이 거기서 끝나고 오로지 문자로 기록된 그 순간 거기에서 말을 전하던 그 이야기꾼의 신화가 굳어 화석이 되는 것이다. 



책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자면, 2014년 6월부터 10월까지 경기문화재단이 진행한 '신화와 예술 맥놀이-아프로 아시아 신화강좌'의 내용을 토대로 김남수, 김남일을 비롯한 소설가, 시인, 신화학자 등의 10명의 필자(강사)들이 직접 각주를 달아 강의 내용을 보강하고 추가 설명을 곁들여 재구성한 것이다. 최초 신화에 대한 개략적인 강의인 1, 2강에서부터 시작해, 3강부터 12강까지는 각각 인류 최초의 걸작 길가메쉬 서사시, 페르시아(이란) 신화인 샤나메와 쿠쉬나메, 중국 한족의 산해경과 55개 소수민족들의 신화, 인도를 대표하는 라마야나, 동북아시아 초원의 영웅 게세르 신화, 인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철학을 담은 마하바라타, 이집트 신화인 오시리스와 이시스, 멀고도 가까운 족, 튀르크족과 그들의 영혼인 알퍼므쉬와 데데 코르쿠트의 서, 일본의 건국신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신화, 그리고 인드라망 위를 지금도 걸어가는 우리나라 신화 바리데기와 오늘이를 다룬다. 


길가메쉬 서사시

인류 4대 문명중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남부 수메르에서 시작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다. 기원전 3천년경 수메르의 도시 생활과 교역은 인간의 기억만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되고 복잡해져 쐐기 문자가 발명되었고, 길가메쉬 서사시의 단편적 일화를 담은 시들이 기원전2천년쯤에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일화들이 연결된 형태로 맞춰진 서사시는 BC 1900년~1600년 사이 고바빌로니아 시기에 출현하지만, 우리가 서사시라고 부르는 표준판은 고바빌로니아판을 베끼거나 수정, 추가 삭제한 것으로 BC1300~1100년 사이에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이 '최종 정리본 조차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리아드><오디세이>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수백년 앞선(p121)'다. 더욱 눈여겨볼 만한 사항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길가메쉬 서사시 안에 있는 우트나피쉬팀의 홍수 이야기이며, 이것은 다시 고바빌로니아 시기의 아트람하시스의 홍수이야기였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이야기와 그 원모델인 아트람하시스의 홍수이야기의 간격은 1천년이다. 1천년의 간극을 두고 자라나고 깎이고 퍼지고 전달되고 민족적 정체성 앞에서 변형을 거쳐 노아의 홍수 이야기로 굳어진 것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노아의 홍수이야기라면 다른 부분들은 어떨까.


19세기 중반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굴 해독되자 바이블과 바벨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노아의 홍수, 인간 창조, 에덴동산 등 창세기의 주요 내용들이, 알고 보니 그보다 1천년이나 앞선 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후대의 창세기가 모방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죠....기독교를 믿던 서구인들은.... 다신교보다 일신교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며 성경을 방어하려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우월함은 이들의 종교관일 뿐만 아니라 현실관이고 세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개한 서구 이외 지역을 개화시켜야 한다고... 제국주의의 논리죠. 


길가메쉬 서사시의 점토판들은 페르시아, 시리아, 터키 등...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예루살렘 위에 있는 므깃에서도 기원전 14세기의 파편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의 유대인들도 서사시를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거죠. 지금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노아의 홍수가 서사시의 홍수를 모방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 듯합니다. (p143~144, 제3강 오수연(소설가))


이집트 신화 오시리스와 이시스

이집트 신화에서 창조자는 새 모양의 빛이었고, 푸른 연꽃 속에 앉아있는 어린애였기도 했다. 창조자의 외로움, 그것이 세상이 생겨난 이유다. 창조자 아툼은 제손으로 제 남성 성기를 자극하여 자위행위를 하여 자손인 남신 슈와 여신 테프누트를 만들었고 두 남녀는 땅의 남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를 낳는다. 남녀가 동양과는 반대다. 서로 사랑한 두 남신 여신 사이에 공기의 신이 끼어들어 남신의 배를 두 발로 밟고 여신의 배를 두 팔로 밀어올려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임신중이던 하늘의 여신 테프누트는 남신인, 오시리스와 세트, 여신인 이시스와 네프티스를 낳는다. 아직 신들이 어릴 때, 태초의 물에 휩쓸려가자 아툼은 자신의 한쪽 눈을 빼서 찾으러 보낸다. 신들을 찾아와보니 아툼의 얼굴에 새 눈이 생겨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눈은 원통하고 슬퍼서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인간이 된다. 이 때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생겨난다. 아툼의 갈곳 없는 눈이 흘린 눈물은 인간이 되었기에 그 원통하고 슬픈 마음이 인간의 부정적 본성을 만들었다. 이 때 이집트의 창조자 아툼은 다른 신화의 불멸하는 신들과는 달리 늙고 쇠약해지는 신이었다. 아툼이 나이들어 쇠약해지자 인간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아툼은 하늘로 올라가 인간들을 굽어보며 때로 벌을주고 때로 동정심을 갖고 구해주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인간들을 굽어살핀다. 그리고 그는 늙어간다. 이집트 신화에서 아툼은 점점 늙어가며, 너무 늙어 더이상 버티지 못할 때, 세상은 끝난다. 


장례문헌에서 기원하는 죽은 자의 영생도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 충분히 긴 시간동안 산다는 뜻이다. 그 끝을 고대 이집트인들은 수백만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대때부터 현대까지 흘러가버린 시간만큼 손해보는 거라는 거다. >신화에서 지상의 정의가 지하의 정의를 정당화하고, 지하의 정의는 지상의 정의를 보장합니다.  현세와 내세가, 삶과 죽음이 서로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사람들은 사후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죽을 때도 내세의 보상이 있을 것을 믿기에 안심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원천이자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p365)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근본 교리인 사후의 심판과 낙원, 이런 발상은 맨처음 고대 이집트인들에게서 나왔다. 한술 더 뜨면, <예수는 신화다>의 저자들은 죽은 후 부활한 신인 신화의 여러 판본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더 먼 옜날의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여 민족적 취향에 따라 각색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죽은 후 부활한 신인에 대한 최초의 신화는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p373)'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오시리스가 그리스로 전해져서 디오니소스로,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로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로 아틸리아에서는 바쿠스로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로 각색되었고,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신화로 각색한 신인이 바로 신약 성경의 '예수'( 374)라는 것이다. 


오시리스는 하늘에서 인간을 위해 땅으로 임한 신이고, 고통스럽게 죽은 신이며, 부활하여 인간에게 희망을 준 신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와 비슷합니까? 오시리스가 적어도 2400년 선배입니다(p374)


세계 각국, 문화의 발상지들에서 생겨난 방대한 서사시와 낯선 신화들에 대한 강의를 읽는 시간 내내 내게는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리뷰에 아주 매우매우 일부밖에는 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내용이 치밀해서 읽는 데 시간도 오래걸렸지만, 그만큼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말고, 여러번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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