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멍충한 - 기묘한 이야기에 담아낸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
한승재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길거리 캐스팅 신화의 주인공은 건축가다. 하라는 건축은 하고, 또 공상도 같이 하면서 소설을 썼나부다. 써놓고 보니 치열한 등단 무대에 던져놓고 기다리긴 싫고, 써놓은 건 아깝고,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겠지? 홍대앞에서 자가 출판한 책을 펼쳐놓고 팔았다. 될 사람은 뭘 해도 된다. 무명의 소설가가 자가 출판한 책을 길거리에서 팔고 있을 때, 무명의 소설가의 책을 눈여겨볼만한 안목을 가진 출판기획자가 지나갈 확률은 얼마나될까. 복권 당첨만큼 힘들지 않을까. 마치 짜고친 고스톱처럼 마법같은 인연이 만들어낸 책은 '등단하지 못한' 소설가의 책 답지 않았다. 물론 이런 대형 출판사의 눈에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정도의 소설이라면 기존 등단 시장에서 배출된 작가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사서 우연히 읽어본 그런 소설이 출판사가 선뜻 출판사의 이름을 걸고 출판할 만큼의 질적 만족을 준다는 점도 마법같은 우연이기는 마찬가지다. 


얼마전 김연수 두쪽 소설 응모해서 입선에 실패한 첫소설을 늘려 연재하면서 갑자기 답글이 이어지고 몇몇 천사같은 님의 찬사가 생기자, 갑자기 혹시 내게도 그런 우연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꿈을 꾸어봤다. 출판관계자가 우연히 들러서 봤는데, 뭐 문장에 확 반했다던가 그런 불가능한 꿈 같은 거 말이다. 그러다가 1부 마지막 플래쉬백 장면을 힘겹게 올리면서 꿈이고 나발이고 장편을 쓰는 진짜 소설가들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힘겨운 감정노동이다. 소설은 어떤 주제의식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생명력을 가지는데, 그 주제의식이란 건 마냥 해피할 수만은 없다. 감정노동의 핵은 그거다. 내 삶, 내 가치관 혹은 내 경험이 가진 어떤 매우 비극적 요소가 그 작품에 투영되는 고통스런 순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장르가 달라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한승재의 소설은 한마디로 '기이한 이야기' 장르다. 어릴 때 읽던 아라비안나이트를 잊지 못해 읽어보리라 오래 벼르거 별렀던 천일야화를 읽기 시작했는데, 현대화된 버전의 천일야화라고도 할 수 있다. 세헤라자드처럼  하루 하루 목숨을 연장시키기 위해 동트기 1시간 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점, 정령이나 마법같은 것들은 나오지 않지만 사람들이 길바닥에 눕기 시작하거나 버스 카드 단말기에 버스카드 대신 열쇠를 대고 내리면 검은 산이 앞에 서있는 비현실적인 세계가 나타난다는 점 같은 기이하기 짝이없는 이야기들이다. 


작품집 속의 이야기들은 작가가 여행중 그리스어와 스페인어를 섞어서 쓰는 니안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쓴 거라고 한다. 이것은 프롤로그에 있는 말로, 소설집을 하나로 묶는 프레임 역할을 하지만, 세헤라자데처럼 매일밤, 내일은 더 재미있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하면서 계속해서 모든 스토리를 끌고 가는 건 아니고, 각 단편들은 완전 별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니안은 이야기에 매료되어 세계 방방 곳곳으로 다니며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작가에게 이야기해준 후 홀가분하게 떠난다. 이야기를 풀어놓은 사람인 니안에 아무 뜻도 없을 줄 알았는데 책의 맨 끝 '불필요할 수도 있는 독후감' 편에서는 니안을 '니안 내안'  할 때 하는 니, 너 그러니까 your inside 쯤으로 해석하고는 니안에 있는 걸 내안으로 어쩌구 하는 익살을 보여준다. 그 작가에 그 친구(인지 동료인지..),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소설집 속에는 중편쯤에 해당하는 비둘기 파티1, 2와 단편인 검은산, 지옥의 시스템, 직립 보행자 협회, 자살에 의한 타살, 사후의 인생, 한물 가버린 이름 등 총 8개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SF라 할 수도 없고, 이런 걸 환상소설이라고 하나. 기이한소설, 말도 안되고 터무니 없는 것들이다. 김중혁 작가의 1F1B 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조금 있지만 문체도 다르고 느낌도 선명하게 다르다. 


작품마다 기호의 편차가 심해 중편에 해당되는 비둘기 파티1, 2는  조금 지루할 뿐만 아니라, 기이한 정도가 심하고, 뭘 말하는 건지 뭘 말하려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직립보행자 협회는 정말 재밌었다. 작가는 가장 진화했다(고 스스로 믿)는 인간이 모든 동물들이 다 할 수 있는 걸 못하는 게 있는데, 그게 눕고 싶을 때 아무데서나 맘껏 눕지 못한다는 점을 콕 찝어서 주제로 삼은 점이다. 그래서 인간의 등뼈가 녹아 내리는 멜팅 현상이라는 진화상의 변이를 겪게 된다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너무나도 유쾌했다. 능청스럽고 그럴듯하게 과학적 근거를 들고, 결국 모든 인간들에게 그 현상이 전이되어 이 세상은 길바닥에 사람들이 마구 누워 있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 된다. 깔끔하게 챙겨입어야 할 아나운서나 TV 스타들도 오다가다 멜팅 현상이 생기면 아무데서나 누워 있게 되고, 바닥에 뒤굴다가 TV 스크린 앞에 서면 옷이 더러워지는 건 기본이다. 


한국 문학읜 등단 무대의 치열함을 우회한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는 온라인 매체를 이용하여 대중의 호응을 얻은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자가출판이라는 무모한 방식으로 화려하게 열린책들 이름으로 등장하기까지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 있다. 그것들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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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4-03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구경꾼이 팝콘 산 거 아까워하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