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허은실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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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이 진행하는 빨간책방(이하 빨책) 팟캐스트의 오프닝은 공중파를 포함해서 내가 이제껏  들어본 어떤 다른 라디오 방송 중에서도 단연 마음을 붙잡는다.  최근에는 자주 못들었다. 백석평전 편을 마지막으로 청취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가끔은 오프닝이 땡길 때가 있다. 초창기 때의 얘기지만, 한 번은 오프닝이 너무 좋아서 옮겨 적어 친구들 보라구 SNS에 베껴 올려 놓기도 했다. 


이동진이 읽을 때는 얘기하듯 자근자근한 목소리로 읽기 때문에 문장을 에세이의 형태로 길게 이어붙였는데 책에는 시처럼 한 문장에서 군데 군데 줄바꿈이 되어 여백을 살렸다.  이렇게 여백이 생기니 이동진이 읽을 때와 느낌이 또 다른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공백 없이 에세이식으로 쭉 붙여서 읽는 게 더 문장이 살아나는 것 같다. 시처럼 맑은 언어를 가졌지만 시와는 다른 전달력이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법. 이동진이 편안한 목소리로 붙여 읽을 때처럼 그 목소리를 청각적으로 상상하며 천천히 읽으니 라디오를 들을 때의 감이 살아난다. 방송을 처음들을 땐 이동진이 직접 써 와서 말하는 건줄 알았다. 이동진도 평론가니 글을 잘 쓰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감성적인 글을 잘 쓴다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기에 이동진을 좋아하게 된 동기가 허은실 작가가 쓴 글을 이동진 진행자가 쓴글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동진은 허은실에게 작은 빚을 진 것일 수도 있다.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작가 소개도 하고 농담으로 글만 잘 쓴다고 핀잔도 주면서 작가가 완전히 뒤쪽에 숨어있는 다른 방송과는 달리 존재감을 나타냈는데. 어쩐지. 아니나 다를까 알고 보니 시인이었다.


아무튼 오프닝이 좋아 따로 책으로 묶어도 좋겠네 라고 생각했더니 또 이렇게 책으로 나왔다. 이동진과 김중혁 작가와의 수다는 사실 농담도 많고 해서 책으로 내려면 많이 걸러져야 하는데 또 거르다 보면 재미가 반감될 것도 염려가 되고 거르지 않고 그대로 책이 될 경우는 시덥지 않은 서로 띄워주기 같은 농담이나 잡담들이 문학적 대화의 흐름을 끊을 것도 같고 그래서 책으로는 안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7권의 문학작품을 엮어 책으로 먼저 냈고 허은실 작가의 오프닝 에세이집도 나왔다. 


내겐 소설가에 대한 약간의 편견 같은 게 있는데 시인 출신 소설가를 좋아한다는 거다. 같은 소설가라고 하더라도 데뷰를 시로 한 작가들은 뭘 써도 또랑또랑 맑은 언어가 마음을 건드린다. 세련된 문장 속에 빠지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때 책읽는 기쁨을 느끼는 나로서는 시인이 잘 이해안되는 시를 썼을 때보다 시인의 언어가 시 아닌 소설이나 다른 글들을 썼을 때 더 편안하다.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던 어떤 사랑도 있었겠지요. 어째서 그때 마음은 위험과 불안, 혹은 상처 쪽으로만 기울어지려 했던 걸까요(P20)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을까? 이런 물음 하나를 쥐고 내내 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p244)


바짝 마른 모래처럼 서걱거리는 가슴에도 이런 문장을 읽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청춘이 있다. 공감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이유를 알 수 없던 방황, 가슴 한 구석에 웅크리던 불안. 청춘을 돌아볼 때 가끔은 그런 미성숙한 감정마저도 그리움으로 뭉개뭉개 피어 오를 공감되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 위안삼을 때가 있다. 딱 이런 문장이다. 


여름날의 빗소리에 대한 공감각적인 문장을 보자. 이 차고 냉랭한 겨울 사이로 뜨겁고 습기찬 한여름의 소낙비 내리던 풍경의 시각, 청각적 풍경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 여름아. 너는 시간 저편 과거에 그렇게 머무는구나. 여름날 급작스레 쏟아지던 소낙비가 가져다준 작은 설레임, 그 작은 동요. 그것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잊고 살았던지를 일깨워주는 문장이다. 

그리고 최초의 빗방울이 두둑, 잎사귀에 닿는 찰나! 세상은 숨을 참는 것처럼 순간, 정지합니다. 여인들은 서둘러 빨래를 걷습니다. 소년들은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며 뛰어가고, 소녀들의 목소리는 높아집니다. 소나기 내리는 여름날의 그 작은 소란과 동요를 당신도 좋아하시는지요 (P22)

당신과 나, 그 관계에 대한 문장은 담담하지만, 참으로 많은 걸 담고 있다. 어떤 음악은 멀쩡히 즐거운 기분으로 틀었다가 선율과 가사에 이입되어 갑자기 눈물 흘리게 되는 음악이 있는데, 어떤 문장은 또 음악처럼 다가와서 마음을 건드리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흔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쓸쓸함이 이런 문장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 아래 문장이 SNS에 베꼈던 문장이다. 다시 만나니 다시 반갑고, 다시 쓸쓸해지고, 다시 마음이 젖는다. 


방금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앉았던 소파가 움푹 들어가 있네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자국 때문에 울어본 일이 있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흔적이 있기 때문이지요.(p78)

비는 감정 전도율이 높아서 함께 빗소리를 듣는 순간엔 침묵조차 친밀해집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빗소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 있으신가요?(p23)

격주 돌아오는 그녀의 오프닝 쓰기 작업은 시인인 작가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내 추측이지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동진이 제작 스폰서인 위즈덤하우스의 외압 없이 독립적인 컨텐츠를 제공하기로 했던 만큼, 오프닝 쓰기 자체가 어떤 금전적인 목적이나, 방송회사 직원으로의 역할로  쓴 글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늘 반짝반짝 어떤 영감이 샘솟듯 솟아나 반짝이는 문장들을 한도 끝도 없이 생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청취자가 그렇게도 많이 늘어나는 것을 알게 되어 부담감도 생기게 되었으니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고달픔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고뇌의 흔적은 고스란히 어떤 주제에 관련된 지식적 탐구라는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가령 예를 들어, 작가는 언어, 특히 단어의 글자 모양, 발음, 뜻, 어원 같은 것들을 자주 탐구한다. 여름은 열다 열리다란 동사의 명사형 어미가 붙은 거로 열매 맺는 시기라는 뜻이라고 한다(p85) 언어는 탐구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으로 동거동락한다.


어떤 단어는 꽈리처럼 종일 굴려보고 또 어떤 단어는 솜사탕처럼 뜯어 먹어봅니다. 책 속에서 만난 단어 하나가 마음에서 며칠을 돌아다닌 적 있으시지요.(p199)

7월이나 8월이라는 말은 어감부터 그렇습니다. 4월이나 10월처럼 시적이지도, 5월이나 6월처럼 부드럽지도 않죠. 치열한 일념, 팔팔 끓는 여름의 이미지가 어감에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여름의 날씨를 표현하는 단어들도 대부분 그렇습니다. 태풍, 땡볕, 뙤약볕, 폭염, 폭서, 폭풍.... 보기만 해도 따끔거리는 저 거친 파열음들!(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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