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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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서 그 때의 심경을 옮겨본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처럼, 아이들의 죽음이 일부는 정치가의 꼴같지 않은 시로, 일부는 절제없이 뿜어대는 감정 소비의 형태로, 아이들의 죽음을 그렇게 추모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고, 함부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이들을 그곳에 그렇게 가라앉게 내버려두었어도. 그걸 그렇게 했어도. 그 다음은 최소한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울어도 혼자 울어야지. 왜 우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왜 백일장이 열린 것처러 앞다투어 전시하듯 함부로 탄식의 말을 쏟아내는 시를 써서 나르고, 한마디씩 보태며 이목을 끌고 소비하느냐고. 나는 무엇에 화를 내고 있었던걸까. 결국은 우리가 손가락질하고 욕을 퍼부으며 날려보낸 불신의 화살끝이 향한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심장이었다. 이 책이 나왔을 때도 '흥 얍삭빠른 출판사라니' 했다가, 수익금이 유족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보고 나서는 바로 애먼 작가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이 책에 글을 쓴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문학동네 소속이면서도 이 책에 글 한꼭지 채우지 않은 작가들은 그들대로. 아이들의 죽음에 어떤 개인적 반사이익을 챙기진 않았을까. 반대로 평소 존경하던 다른 유명 작가들은 왜 책이 이렇게 얇아지도록 한꼭지 더 올리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정권을 의식했을까. 사건을 이용하려는 정치가들이 만들어 덫을 의식하고 함구하기로 한건가. 


 우리 사회가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의심과 원망의 화살은 이렇게 서로를 향하다가 결국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 때. 세월호 아이들은 군집명사였다. 한명 한명의 아이들은 개별적으로 인격체를 갖추고 한 가정의 부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었지만, 학교라는 제도권 아래 한꺼번에 경쟁의 칼끝에 겨누인채, 웃고 떠들고 나누러 나가는 여행길조차 개별 인간으로서가 아닌 군집명사가 되어 스러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시받고, 뭉처서 하나처럼 취급받은 집단명사였다. 배가 가라앉는 그 무서운 시간에 단체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따라야 했던, 개별적인 저항없이 똑.같.이 따라야 했던, 그래서 함께 동시에 바다 밑으로 가라 앉은 아이들은 집단적인 희생 뒤에서 무언가를 황홀하게 취하게 될 보이지 않는 어떤 인간들에 의해 군집명사가 되었다. 부모와 친척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 군집 명사를 향해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릴 망정, 누구도 한 명씩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우리들은 그들의 집단 떼죽음만을 알 뿐, 그 한명 한명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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