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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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할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이 모든 글자에 동일할 수 없는 기억의 각인을 남겼고, 동일할 수 없는 온도와 색체 그리고 의미의 층차를 형성했다. p10


한글의 과학적 아름다음에 어릴적부터 노출되어 살아온 나는 항상 중국 글자가 비과학적이고 까탈스러운데다가 무식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해왔다. 회의문자가 갖는 최대 이점은 말이 달라도, 시간이 지나도 뜻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불과 한세기 전만해도, '우리말이 듕국과 달라' 불편했던 우리 민족은, 말은 달라도 뜻이 통하는 중국말로 된 글자를 읽고 공부를 하고, 그걸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공무를 보고, 시와 책과 일기들을 남겼다. 거대 중국과의 유교적 학문적 문학적 경계를 히미하게 색칠한 장본인도 한자였다. 모든 인류 문화 유산은 위대하다. 한자도 그렇다. 한자의 위대성은 그것이 품고 있는 길고 긴 시간과 그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이다. 


거북이 등껍질과 소의 뼈에 남겨진, 갑골문자, 사물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인 한자가 어떻게 끊임없이 생겨나는 구체적인 사물과 무한 번성하는 관념들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3천여년의 장구한 세월속에는 처음 문자가 만들어지던 시대의 문화와 생활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것이 시간을 따라 변천해온 역사까지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 일상의 모습, 개념들이 물체의 형상을 본뜬 기호 속에 담겼기에 중국의 문자학자들은 당시의 풍속과 속속 발견되어 온 갑골문자들의 변천사를 통해 선인들의 사고방식까지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긴 시간적 공백이 진정한 의미의 해독을 막고 있다고 해도, 그림으로 표현된 유물은 최소한 무얼 그렸는지까지는 추측 가능하다. 그러나 오래된 글자들은 다르다. 고대 이집트 글자를 해독하는데 800년이 걸렸다. 언어는 시간과 함께 빠르게 변하므로, 수천년전 소리를 기호로 바꾼 글자가 기원을 찾을 길은 그 때의 소리를 복원하는 길 뿐인데, 수천년 전에는 녹음기가 없었다. 예를 들어 새모양의 고대 문자가 알파벳 a와 같은 발음을 갖는 병음 문자일거라는 생각을 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새모양을 비롯한 여러가지 사물을 본뜬 모양의 기호들이 표의어가 아닐 거라는 상상, 야만적인 고대인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잘게 나누어 모음 자음을 구분하여, 기호의 조합으로서 모든 소리를 모방하는 문자를 완성했을리 없다는 근거없는 오만심이 고대어의 해독을 그토록 지연시켰을런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다. 늘 그래왔다. 언제이고, 지금 가진 생각이 가장 완성된 사상, 완성된 철학인 것이다. 


수천년의 시간동안 변화하며 글자에 새겨 놓은 인류 문명의 흔적들과 생각의 단초들은 경이롭다. 저자는 글자 하나하나들을 요리조리 살피고 굴리고 흔들고 어루만지며 그것들이 만들어져서 갑골에 새겨지고 뜻이 변형되고 글자가 변형되면서 사라지고 또 살아남은 과정들을 추적한다. 


이제까지 발견된 갑골문자는 5천자. 그중 뜻을 알아내고, 현재 쓰는 한자의 원형으로 발견된 글자들은 약1천자 가량이라고 한다. 일부는 사멸의 과정을 거쳤다. 수천년동안 대다수의 갑골문자는 한약재로 소화되었다고 한다. 몸에 좋은 거라면 개똥이라도 주워먹는다더니, 실제로 그랬단다. 시간의 축적이 언어의 변천 과정에서 수많은 신조어와 사어들을 만들어 내듯,  뜻을 가진 중국 문자는 시간의 흐름을 거쳐 전주와 가차라는 성부와 의부의 조합과 지사자들과의 조합에 의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 수많은 헌 문자들을 버렸다. 저자가 그의 딸과 함께 발견해 낸 말(동물)에 대한 한자어만 18가지였다. 그들 중 일부 문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말이다. 


문자가 가진 문화의 흔적은 때로 아프다. 노인 살해와 영아 살해의 흔적을 고스란히 상형화한 갑골문자 해(육장, 젓갈)는 윗부분은 절구공이를 두 손으로 잡고 아랫부분은 절구공이에 있는 사람을 산 채로 내리쳐 그 피가 튀고 있는 모습이다. 손에 밧줄을 들고 간난 아기를 교살한 뒤 삼태기에 담아 피묻은 영아의 시신을 쏟아버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기(버리다)자도 제한된 식량과 초과 인구의 억제책으로 노인과 영아 살해라는 것이 일상화된 문화적 환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글은 한글대로 정교하고 과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지만, 한자 역시 그 장구한 세월동안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중화권 및 주변국들의 문화를 이어주고 지식 탐구의 확대에 크게 이바지한 글자이다. 그 글자들이 가진 낱낱의 사연들을 '대만 최고의 지식인'이 전방위적인 지식과 문학작품과 예술가와 철학사이를 오가며 흥미롭게 기술한 책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떠오르는 지적인 문체가 (때로 산만하게 느껴졌으나) 매혹적이었고, 새롭고,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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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2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한글은 실용성면에서 어느 글자에게도 지지 않지만, 한자도 묘한 매력이 있어요 압축미? 외우기 힘든것만 빼고요 ㅋㅋ 다시 한자 공부 하고 싶지만 아..게을러... (ㅋㅋㅋㅋ 앞으로는 이렇게 댓글을)

CREBBP 2015-02-02 18:24   좋아요 0 | URL
다른 공부 안한 건 별로 후회 안되는데, 살면서 느끼는게 어릴 때 한자를 제대로 달달 외우지 못하고 포기한 게 후회돼요 마이 불편해요.ㅎ(이에는 이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