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 인생의 힘든 고비에서 나를 잡아준 책들 인문낙서 1
홍정 지음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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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학문이라고 이름붙여진 범주의 지식을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완전히 정립된 이론을 체계적으로 하나의 교과서에 때려 넣은 것을 그대로 주입적으로 학창시절에 만나는 방법과 인생을 통해 기회가 생기거나 필요에 의해 찾게 되는 방법이다. 철학을 만나는 방법은 주로 전자였다. 철학을 교과서적으로 만나는 방법은 우리가 이제껏 철학이 진저리쳐지는 추상 어휘와 그게 그거같은 정신적 활동을 각기 다른 용어와 학설과 학파라는 이름 하에 묶어두고, 그걸 전혀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읽는 일이었다. 철학을 인생에서 만나는 방법은 어떤 인생의 전환점이나 자기 성찰의 목적이 필요한 시기에 위기를 다루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생을 찾고 나를 찾는 방법이다.

 

저자는 아버지의 사고로 인한 죽음과 연이은 동생의 자살로 인한 충격으로 고통을 받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시골의 축사로 들어가 철학에 매달리면서 공부하고 깨달은 내용을 책으로 냈다. 시대와 사조 혹은 철학자로 묶이지 않고 물 흐르듯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사상을 철학자와 철학자 사이를 유영하며 강의하듯 철학을 전달한다.

 

책의 형식은 이 앞전에 읽은 김탁환의 <읽어가겠다>와 비슷하다. 인상깊은 철학자의 저서를 자신의 생각과 함께 버무렸다. BC 시대를 살았던 세네카의 인생론과  몽테뉴의 수상록이 곳곳에 인용되면서 철학적 사고의 흐름이 이어진다. 부제를 붙인다면 홍정이 읽어주는 몽테뉴의 수상록 이라고 붙여도 무방할 듯이 거의 모든 철학자들의 사상 곳곳에 몽테뉴의 해석과 철학이 따라다닌다. 책의 전체로 볼 때 반은 여러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인용한 인용문이고 반 정도는 그들의 철학 개념에 대한 해석이 에세이 혹은 강의록 형식의 글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에서도 몽테뉴의 수상록이 가장 많고, 세네카의 인생론이 두번째로 많다.

 

니체, 샤르트르, 쇼펜하우어, 몽테뉴 등의 고전 저서들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지만, 오히려 그 철학자 개인들을 일생동안 지배했던 사상들이 집약된 직접적인 저서에서 선택된 문장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해석하는 홍정 자신의 글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 아마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하게 이해한 부분은 1/10 혹은 1/5 정도나 될까. 얼마 전에 읽은 열린책방의 <철학한입 더>도 철학의 입문서도 마치 부페식당처럼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풀어서 열거했지만, 그 때에도 어렵게 느껴져서 철학이란 놈이 워낙 나에게는 어렵구나 싶었는데, 이 책을 통해 직접적인 저서를 일부 엿보니,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철학자 개인의 일생을 관통하는 사상을 몇줄로 요약한 교과서적 해석이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점에서 곳곳에서 인용하한 문장들을 통해 원철학자의 사상을 홍정의 해설과 함께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 모든 책을 다 읽어볼 수도 없고, 아니 하나라도 제대로 읽어볼 수가 없는데 이런 기회로 조금조금씩 맛보기를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냥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조금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김탁환 작가는 <읽어가겠다>에서 평론가가 아니라 소설가이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쓰는 평보다 훨씬 쉽게 작품들을 설명한다. 평론가들은 이론에 갇혀 본질을 제대로 못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같이 전방위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지식을 독자가 따라잡는데 헉헉거리기 마련이다. 작가 홍정 이 분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철학서를 읽으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정작 본인은 숨막혀서 철학을 했다지만, 숨이 안막히는 일반 독자가 철학을 이 책으로 대하니 숨이 막혀올 듯하다.

 

에를 들어 자기 탐구의 부분이 그렇다. 전반부에서, 그리고 후반부에서 자기성찰 및 자기 탐구에 대한 시공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으로 탐색은 이해라는 선을 넘어서면 철학이란 누에고치처럼 자기만의 집을 짓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자폐증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하라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정확하게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는 과학에 대한 편협된 생각은 아마도 과학 철학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게 나의 인내력을 파괴시킨다.

 

과학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적인 이성이 아니다. 자신을 망각하는 이성이다... 훌륭하게 사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 캐묻는 즉, 심문하는 삶이고.... 과학에서 앎의 세계를 유용성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자기와 세계를 분리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자기와 세계는 일치한다. 계몽주의 과학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 것이 쇼펜하우어의 의지이다. .... 이 때 세계와 나는 일체가 아니다. 과학적 이성이 원인이고 세계는 이 원인의 지배를 받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기계론, 인과론, 결정론, 운명론이며 필욘이 지배한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소크라테스와 공명한다. (64쪽)

 

이렇게 전혀 무슨 뜻인지 숨막히게 하는 문장들은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철학자로서 자신이 발견한 사고를 글자로 옮겨놓는 것에 더 치중한 듯한 모습으로 비친다. 많이 중략했지만 대략 위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를 어떤 독자가 제대로 이해할지 의문이다.

 

몇 달 사이에 읽는 책마다 몽테뉴가 자주 인용되고 언급되어서 궁금했었는데, 이 책에서 몽테뉴의 사상의 일부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수상록은 각 파트별로 엄청나게 두꺼운 것 같고(인용된 페이지 중 900쪽 근처에 있는 것을 보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저서를 남긴 것 같다) 그의 문장은 물론 저자가 좋은 부분만 골라서 인용했겠지만, 마치 요즘으로 치자면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는 듯 매우 유려하면서도 공감이 많이 되고  쉽다. 이 책을 통한 몽테뉴와의 만남, 세네카, 니체, 쇼펜하우어, 소크라테스를 보다 훨씬 가까이서 인용문과 설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었으며 철학이라는 놈이 나랑 친하기는 어려워도, 그렇게 으르렁 거리면서 적대적으로 굴 필요는 없는 놈이란 걸 알게 해줬다고나 할까. 철학아 가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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