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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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유독, 시작 문장이 강렬하게 사로잡는 소설이 있다. 두고 두고 회자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의 <칼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그 때, 작가 김훈은 '꽃은'과 '꽃이'의 단어 하나, 모음 하나와 받침 하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우주를 찾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보다는 그 다음 줄,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와 '나는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가 더욱 신비하다. 


인간의 기억이란 한낱 수없이 스쳐 지나간 더없이 많은 시간 중의 아주 미세한 조각 연기처럼 흩어져 없어질 약하디 약한 것이다. 영겁의 시간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없어지고 말, 실루엣처럼 살짝 드러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자신의 사라진 기억 대신 실존하는 현재를 만들어준 흥신소 사무실이 문을 닫고 사장이 은퇴를 하자, 기는 사라진 자신을 찾아 나선다. 수십년 전의 자신을 기억하는 폴 소나쉬체를 만나면서 그의 기억 되살리기 여정은 시작된다. 그가 찾아가는 것은 기억인지, 그의 상상력인지 독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몰락한 러시아 망명 귀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쓸쓸한 망명 귀족의 최후를 회상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사진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였다. 그는 망명귀족 같은 멋진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 그 해의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어떤 가문의 아들이 아니라, 그 자취를 찾아내기가 한없이 더 어려울 남아메리카 사람이었던 것이다. (p96)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건데, 이상하리만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갑작스런 방법으로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찾아오는 일들이 종종 있다. 아빠가 편찮으셔서 그런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10여년전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의 기억이라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희미한 순간적인 것들이라,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말로 설명하려고 언어가 되는 순간 기억이라는 불확실하지만 진실에 더 가까운 것에서 확실하지만 디테일이 가미된 어떤 허구에 더 가까운 것들로 왜곡되는 것을 느낀다. 어떤 장면 장면들 스치듯 지나가지만 의식과 무의식을 왔다갔다 하며 때로 자신과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것 사이를 방황하는 것들 말이다.  
태어났을 적에 내가 얻은 그 이름을, 내 생애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불렀던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환기시켜주었던 그 이름을 스스로 되뇌어 보았다. 페드로(p101)

그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가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130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만일... 이라는 공상에 자주 빠졌다. 내가 만일 모든 기억을 잃고 갑자기 거리의 한 복판에서 아무 것도 없이 덩그마니 남겨졌다면 이라는 상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혹시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기억은 어떤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들일까 하는 것까지... 언젠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나를 기억하는 방법이 기가 막혔다. 너~ 미스김 싫다고 교과서를 창 밖으로 다 던져버렸잖아 널 어떻게 잊겠니. 내가 기억하는 나는 조금 철없긴 했어도, 어른에게 찍 소리 저항 한 번 못해봤는데.. 그녀가 기억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일지,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 남일지 아직까지 의문이다. 떠들다가 칠판에 이름이 적히거나 지각해서 벌스곤 했지만, 그렇게 불손한 짓을 하다니. 게다가 던져버린 책은 내 손으로 다시 주워서 올라왔어야 했을 것 아닌가. 3층이었는데.. 참으로 가지가지다. 

골목들과 대로들의 저 미궁속에서 어느날 드니즈 쿠드뢰즈와 나는 서로 만났던 것이다. 거대한 전기 당구대 위에서 때떄로 서로 마주쳐 부딪치기도 하는 수천수만 개의 작은 당구공들처럼 파리 시내에서 오가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따라가는 저도정들 가운데서 서로 마주치는 도정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이제는 아무것도, 심지어는 하나의 반딧불이 지나가면서 남기는 저 가느다란 빛의 줄무늬조차도 남은 것이 없는 것이었다. 156

그러나 소설은 그렇게 천진하게 옛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은 일상을 삼켰고 불안과 망명과 도피와 같은 불안 속에 삶을 던져버렸고, 망명귀족이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이든 속이고, 숨고, 쫓기고, 도망 속에 가둔다. 잃어버린 것은 기억 뿐만이 아니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삼켜버린 전쟁은 포화가 없어도 이미 상실을 의미할 뿐이다. 

이 도시 안에서, 발걸음을 서둘러 걷고 있는 그 모든 그림자 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서로 길을 잃은 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190

내가 그날 저녁에 지미 혹은 패드로, 스테른 혹은 맥케부아 중 어느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191

찾은 기억은 온전히 나의 것일까. 잘못된 판단으로 눈덮인 알프스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사라져갔을 연인들. 그 기억이 역사의 전부라고 해도,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무엇을 잃지 않았으며, 무엇을 남겨놓았을까. 어쩌면 그의 기억은 힘겨운 현실을 외면하고자 스스로 지워버린 것일까. 그리하여 기억이 없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가는 일이 유일하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조건이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점차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마침내 증발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창유리를 뒤덮고 있는 저 수증기, 손으로 지울 수도 없을 만큼 끈질긴 저 증기에 불과한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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