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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평범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도 건져 올려보면 문학의 씨앗이 있다. 인생을 한 반 쯤만이라도 살아왔다면 흔히들 두팔을 한껏 벌려 이만큼 써도 모자란 두께의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허세부릴 만큼 드라마틱한 삶의 전환을 경험한다. 왜 안그렇겠는가. 살아온 시간이 얼마인데. 그 사랑, 상처, 바람과 절망 사이, 생고생,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떠나온 그 곳과 불타버린 다리, 그리고 우리의 생 반대쪽, 다리 건너편엔 가지 않았던 길들이 있다. 그 숱한 사연들을 어찌 소설 책 한 권에 다 구겨넣을 수 있을까.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소설가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의 일부를 소설로 바꾸는지 구경하고 싶을 때가 있다. 김연수 작가는 그 비밀을 이곳에 풀어놓았다. 삶의 일부가 소설이 되는 비밀, 생각들이 세상에 나가 독자의 생각들 속을 파고들게 하는 과정.
소설가는 일생에 딱 한 번 자기 이야기로 자전적 소설을 쓴다지만, 모든 소설은 자전적 요소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내면에서 탄생된 모든 것들이 작가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 탐구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완벽한 신이라고 해도, 인간이 뇌와 심장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의 능력은 결국 우리에게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말이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 전혀 존재하지 않을 인물을 창조해 냈다고 해도 작가의 자아가 투영되지 않고서야 책 속의 문자로 박혀질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일생에 한 번 쓴다는 자아가 가장 많이 투영된 자전적 소설 하나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소설들은 어쩌면 작가의 또 다른 길, 그러나 가지 않은 길일 것이다. 순간의 다른 선택과 순간의 다른 우연들이 조합된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똑같은 평행 우주 속의 자신, 다른 버전의 작가의 자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인생은 연속적으로 단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상에 있기에 가지 않은 길과 불태워버린 다리는 운명과 만난다. 절망적 낭만과 아련한 그리움, 아쉬움이 있는 곳이 다리 건너 저쪽 편, 반대쪽 세상, 가지 않은 곳, 미지의 세계다. 시간이 인생과 함께 흐르고, 내가 선택해온 나무 가지는 점점 가늘어 선택의 폭이 적어지지만 작가라면 내가 불태워버린 내 인생의 어떤 다리 건너편 세계로 성큼성큼 걸어가 단단하고 두꺼운 나무 밑둥부터 새롭게 생을 창조해나갈 수 있다. 그것이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것이 길거리에 발가벗거진 채로 서있는 같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은 소설 속 인물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자아를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강렬하게 남아 각인된 이 책의 키워드로 '토고', '생고생', '다리를 불태우는 행위' 가 있다. 순수 문학을 좋아하는 우리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가 하는 일의 첫번째가 '토고'를 쓰는 일이라고 했다. 토고는 토나오는 초고다. 궁색하고 초라한 어휘, 유치하고 감상적인 표현, 진부한 상상력..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글이란 걸 진지하게 써본 사람이라면 어젯밤 자신이 쓴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작가로서 만인의 존경과 부러움을 사고 있는 김연수 작가 자신조차도 글을 쓰고 난 다음날 아침 다시 들여다보면 이런 토나오는 느낌을 갖는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한다. 이런 위안이 또 있을가. 그러나 모든 훌륭한 글은 그 토고에서 시작된다.
토고조차 우리는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른다. 김연수는 설명한다. 우리는 머리속에 어떤 생각, 어떤 스토리들을 풀어내기 시작해야 단단하게 갇혀진 그곳을 빠져나와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고. 폴 오스터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그는 작품의 탈고가 끝나기 전까지 소설이 어떻게 흘러갈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하루 종일 지정된 시간에 골방 책상에 앉아 펜을 꾹꾹 눌러 생각이 시키는 대로 적고, 그것을 원고지가 너덜너덜해질때까지 고치고, 더이상 못알아보면 새 원고지에 수정된 원고를 다시 꼭꼭 눌러 적고 그 작업을 몇차례씩 거치면서 고쳐나간다고 했다. 이야기의 탄생과 소설의 완결은 그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일찍이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들어 있는 조각 작품을 정으로 쪼아 끄집어 내는 것이 조각가의 할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작품의 시작은 돌을 고르는 일이다. 여기서 날 꺼내줘 라고 그를 향해 소리치는 조각품들이 숨어 있는 돌들을 찾아 다니는 일이 작업의 시작이었다. 미켈란젤로 돌에서 작품을 꺼내는 작업은 삶의 시간이 적재해준 다양한 경험을 상상력과 결합해 소설로 풀어내는 소설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연이 됐든 머리 속이 됐든 그 속에 내재된 것들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예술 행위라는 데에 두 예술 사이의 합의다.
추리소설이나 장르 소설의 경우 반대로 이야기와 인물 성격 등을 완벽하게 구상한 후 거기에 맞춰서 글을 채워나가야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다빈치와 비슷한 걸까. 반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풀어나간다는 김연수 작가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시작해서 주인공의 성격도, 이야기의 전개 방향도, 그 아무것도 모른 채 빠르게 글을 적는 일이 새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실제처럼 잘, 정말로 일어난 일처럼 믿어지고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도록 핍진성있는 글을 쓰는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준다. 예를 들어 모든 문장에 '왜?'와 '어떻게?'라는 의문사를 붙여서 해답을 구하고 '왜?'를 통해 알아낸 대답은 백스토리로, '어떻게?'로는 디테일이 된다. 토고가 소설이 되어 가는 과정의 일이다. '왜?'라는 질문은 주인공의 동기를 강조하는 캐릭터 중심의 소설인 본격문학의 장르가 되고 '어떻게?'라는 질문은 플롯이 이끄는 대중문학 장르가 된다.
소설가가 아닌 사람이 소설을 쓰는 일. 이 일은 작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소설 속 주인공이 강을 건너 돌이킬 수 없도록 다리를 불태워 버리는 행위와도 같다. 작가라는 직업을 지배하는 생고생의 길로 접어드는 첫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수십권 책으로도 모자라는 자신의 얘기, 수많의 선택의 순간에 어쩌면 평행 우주의 다른 세계였다면 자기가 선택했을 수도 있었던 또다른 이야기, 바다만큼 넓은 유전자의 조합 속에서 어느 하나의 위치나 순서가 바뀜으로 해서 뒤바뀐 성격이 행할 수 있는 기이한 행동들, 상상 속에서 자라나고 숙성된 이야기들이 바깥 세상으로 나오고, 토할만큼 역겨운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맑은 정신으로 고치고 또 고치고는 행위를 끝도 없이 계속하는 것이다. 소설가의 일은 토고가 나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장 찢어버리고 싶은 원고를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끝에 탈고와 탈고를 거듭한 끝에 다음 날 아침 읽어봐도 더이상 토가 안나와야 원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이제까지 왔던 길의 끝에서 강을 건너고 건너온 다리를 불태우는 일이다. 단, 소설가의 생고생은 소설 속 주인공의 생고생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그리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외롭기만 하다. 그렇다고 공인된 작가가 되어 그걸로 밥벌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는 보장은 눈꼽만큼도 없는 세계로 발돋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꿈을 한 번이라도 꾼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깥 밥벌이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과연 소설이 출판될 수 있을까, 인정받을 수 있을까만을 의심한다. 먹고 사는 건 그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