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채널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진리'라는 게 정말로 있는 걸까?   영원히 변하지 않고 모든 이치를 다 설명해주는 어떤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 찾는 것은 보지 않은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와 어떻게 다를까? 현대과학은 랄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뉴튼 심지어는 아인슈타인마저도 버렸다. 매번 구시대의 진실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의 진실이 혁명처럼 다가와 정상과학의 범주 내에서 발전하고 사그라졌지만 그 때마다 역사속의 우리는 그 당대의 과학을 진실로 믿었다.  기초와 토대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그 기초와 토대를 튼튼히 해야 즉, 현재 파라다임이 믿고 따르는 정상 과학  내의 기본 지식들을 단단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다음 단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 기초와 토대라는 말은 집짓기에는 적당할 지 몰라도 과학적 은유에는 적당하지 않은 건 아닐까?



과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과학이 만들어져온 과정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물이 왜 H2O라는 분자식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성도 없는 줄 알았고 배우지도 않았다.  교육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를 배우지 않는 건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다. 선진 외국에서도 물의 분자식이 H2O라고만 배운다. 그게 영원한 진리이고 그것만 알면 되지 그 전에 물이 무엇이었다는 것은 배우지 않는다.  그러니까 H2O 분자식 하나가 탄생되기까지 최초 화학이라는 분야를 선도했던 플로지스톤이라는 패러다임의 탄생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논리가 화학 혁명에 기여한 사실들. 그리고 그것의 초라한  몰락과 그 몰락을 이끈 야심찬 라봐지에의 산소 패러다임의 이론적 약점을 알 필요가 있다고? 그렇다. 라봐지에는 산소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야심차고 패권주의적 행보에 의해 무너진 그 이전의 화학, 플로지스톤 이론과 그 이론의 대가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산소와 산소를 얻는 방법은 우리가 모른다. 라봐지에는 플로지스톤의 발견에 밥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 그 이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그대로 남겨놓았어도 인류 과학의 역사에 기여했을 기존의 지식과 패러다임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라봐지에의 이론 역시 수도 없는 헛점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우리가 다만 모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라봐지에의 '산소의 발견과 화학적 역할'은 그러니까 승자에 의해 새로 쓰여진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세계적인 과학철학자, 장하성은 이 책에서 '다 지나간 과학을 배워서 뭐하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지금 신봉하는 과학도 다 나중에는 지나갈 과학(221)'이라고 말한다. 프리스틀리는 금속회(녹)를 유리병에 넣고 큰 렌즈로 햇빛을 모아 가열해서 금속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체를 발견했고, 그 기체가 뭘 잘 태우는 성질이 있다는 것과, 쥐가 그 속에서 보통 공기보다 3배나 오래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호흡해본 결과 가볍고 상쾌한 느낌을 얻었고, 이 순수한 공기가 미래에는 사치품으로 팔릴 수도 있겠다고 예측했는데, 결국 그것이 라봐지에가 자신을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면서 다른 이름인 '산소'를 붙여 발표하여 유럽 화학회의 패권을 잡는 데 공헌한 기체가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알고 있는 라봐지에는 남(프리스틀리)의 발견을 가지고 발견자가 추종하는 이론을 뒤집고 이론을 박멸 대상으로 때려잡아 유럽 화학계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라봐지에의 이론은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진다는 주장을 거꾸로 산소가 더해지는 것으로 재해석한 것 뿐이며, 모든 산에 산소가 들어있다는, 황당하고 엉뚱한 주장을 그대로 산소라는 이름에 담아버리는 아이러닉한 실수(자신은 실수인지도 모르고 죽었음)를 영원히 산소라는 이름 그 자체에 남긴 사람이다.  


그 후, 돌튼의 원자 이론과 아보가드로의 이원자 분자 가설, 그 이후 일어난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의 결별, 그리고 물리화학의 등장에 의한 화학 이론의 여러가지 버전과 같은 과학적 패러다임의 역사를 읽고 나니, 저자 장하석이 주장하는 바가 결국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과학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와 일치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부분이 태반인 과학책에 목말라 했던 이유를 저자가 알려준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과학자가 아닌 시민들은 과학이 말해주는 결과는 별로 알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된다. 라고. 물이 H2O라는 사실을 몰라도 일반인은 훌륭하게 자기 몫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하며 일상을 아무 불편없이 살아갈 수 있다. 반면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과정과 어떤 사고 방식으로 어떠한 역사적 굴곡을 거쳐 그 결과, 우리가 교과서에서 정답으로 혹은 궁극적 진리로 배우는 해답들을 이끌어냈는지는 일반인이 알아야 된다고 말한다. 그것을 알아야 역사 속에서 현재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고, 정책을 이끌어 낼 수 있고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종교일 수 없고, 과학이 종교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열차게 기초가 어떻고 토대가 어떻고 하며 애써 외운 지식들의 탄생과 발전과 어떤 소멸 끝에서 이루어낸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과정을 알지 못하고 결과만 주입된다면 과학은 종교적 맹신과 다를 바가 없다. 과학의 발달 과정은 인류 역사가 겪어왔던 사회 제도적 변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진리이자 토대라 믿었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헛점이 드러나고, 헛점들은 마지막 부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킬때까지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혁명적인 변화를 겪으며 변혁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 패러다임의 구조와 맥을 같이 한다. 


역사는 늘 승자에 의해 재미없고 유용하지도 않도록 다시 쓰여진다. 과학사에서 진리라고 믿는 것들은 현재의 승자인 현재의 패러다임과 그 속의 정상과학이지만, 과학사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승자가 영원한 승자일 턱이 없다. 수천년동안 반복되어온 진리 찾기 게임이 오늘 내가 교육받고 믿는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서,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고 해서  현재 지금 여기에 있는 과학이 진리이며, 진리 찾기 게임은 완전히 끝났다고 믿는 것은 맹신적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반 정도 읽다 말았는데.. 중간에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분명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읽은 내용을 이 책에서 설명하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매우 쉽게 잘 설명하는 바람에, 토마스 쿤 자신이 쓴 글보다도 이 책을 통하여 토마스 쿤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혁명은 낡은 세력이 죽어야 완수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의 승리는 반대파를 설득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반대파가 다 죽고 나면 새로운 것에 익숙해진 새 세대가 자라면서 이루어진다는 독일의 물리학자 플랭크의 인용(p124)이 생각난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패러다임 속에서 이루어낸 것들이 영원한 진리라고 믿을 수도 또  진리가 아니라고 믿을 수도 없다. 단지 그 사회 전체가 믿는 어떤 '진리'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살아남게 되었나를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필요한거다. 쿤의 과학혁명 이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까닭은 그것이 과학을 불신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기억해야 될 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이용당하는 모든 것들을 나몰라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


책에서 느낀 점 중 또다른  점 하나. 우리가 과학 서적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스토리 위주의 짦막한 과학 상식을 경계해야 한다. 라봐지에 시대의 과학사를 통해, 우리가 단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토막 상식들을 마치 지식인 것처럼 이용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를 학습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라는 교훈을 얻는다. 전체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H2O 따위를 몰라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가 따르는 것을 한 번쯤은 의심해볼 수 있는 생각은 가져볼 필요가 있다. 과학이란 어떤 가설로 시작해서, 꾸준하게 그 가설이 맞다는 가정하에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어 때려넣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가설이 조금 조금씩 틀리다가 언제 어느때고 그 자잘한 틈들이 점점 벌어저 아주 큰 구멍이 되면 둑이 무너지듯 그 토대와 가설과 믿음이 모두 무너질 지도 모를 일이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던 시대가 지나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대에 살았지만, 양자역학이니 끈이론이니 멀티 유니버스니 하는 세계로 나아가면 누가 누구를 돈다는 생각 마저도 우스운 이야기가 될 지 모른다.  


간단하게 리뷰를 쓸 수는 없는 책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리고 그 많은 내용이 점점이 머리속에 흩어져 있는데 요약할 수는 없다. 책을 보면, 느끼는 게 있고, 배우는 게 있고, 깨닫는 게 있고 각기 조금씩 다른 정신적 차원의 만족을 주는데, 이 책은 매우 복합적으로 다양한 영역에 뇌를 걸쳐 자극한다.  과학 상식적으로도 배우는 게 많은데, 그 배움이 너무나도 쉬운 언어로 쓰여져 있을 때, 그 책을 쓴 사람이 <온도계의 철학> 같은,  찔러도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철하고 어려운 과학철학책을 쓴 사람의 책이라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감동까지 밀려온다. 장하성 이 분, 정말 너무 멋있다. 완전 광팬이 되었음. 아이들,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더 길게 못쓰는 게 아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닉네임 2015-07-09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정적 오타가 있기에 알려 드립니다.
끝에서 두번째 줄, 저자 분 대신 그의 사촌 형님 이름을 적어 놓으셨네요. ^^
저도 장하석 교수를 좋아합니다. 그의 친형님도 좋아하고요.

CREBBP 2015-07-09 16:42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처음에 몇번 헷갈리더니 점점 더 헷갈려져서 구분이 안되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