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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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누가, 무엇을 위하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은 진짜 우리가 제목을 읽고 바로 상상하듯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는 방법을 기술적으로 나열한 걸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펴내는 걸까.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세상의 책을 다 읽지 못한다. 다 읽기는 커녕 세상의 책이 백사장의 모래밭이라면 평생 책을 읽는다고 해도 모래 한줌을 손안에 쥔 것 뿐이다. 좀 읽는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특정 시대에 많이 읽히는 책들 혹은 자신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관심 분야 내의 책들을 많이 읽을 뿐이다. 이 책에서 인용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의 주인공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으려면 1만년은 걸려야 된다.

 

저자는 책의 제목을 통해 우리 사회의 책 숭배 현상에 대해 날을 해학적으로 세운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터득한 '안읽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읽은 지 꽤 한참(2~3달) 되어 무슨 내용인지 많이 잊어버린 현재 이 책에 대한 나의 상태를 분류해 본다면 '안읽은 책'에 해당된다. 그는 비독서의 범주를 전혀 안읽은 책 외에도 책을 대충 훑어본 것, 사람들이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그리고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까지 포함하여 범위를 넓혔다.

 

피에르 바야르의 정의에 의하면, 많이 잊어버려 '읽지 않은'의 범주에 해당하는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목차를 보면 된다. 전체가 3부로 나뉘어 정리되어 있고, 이것들은 앞서 언급한 비독서의 방식들, 담론의 상황들, 대처요령 이렇게 세 가지이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개념처럼, 책의 세세한 부분을 읽게 되면, 세상의 모든 책,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계관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낭비라는 시각이다.  총체적 시각을 갖기 위하여 책들과 책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진정한 교양의 완전성을 설득한다.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자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음으로써,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교양인으로서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다.

 

비독서의 다른 범주로 망각의 독서에 대해 말한다. 읽었으나 잊어버린 책,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책들이 과연 읽은 책이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내게 동질감을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책읽기에 대한 생각도 예리한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잊어버리고, 책을 읽는 것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시 손질된 불명확한 기억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점점 빠져든다.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망각에 의해 그 내용은 들어올 때처럼 빠르게 하나씩 층발해 나가는 책이라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판단에 영향을 준 그 담론들과 상상력들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독서는 단지 일시적이고 덧없는 지식을 제공할 뿐, 책과 맺는 관계의 진실성은 책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독서에서 뽑아낸 조각들, 서로 뒤얽혀 있거나 개인적 환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그 조각들을이 내면을 이루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비독서의 유형에 이어 2부에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들을 적고있다. 그것들은 사교 생활에서, 선생 앞에서, 작가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들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책을 별로 읽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들의 예를 책에서 가져온다. 자 책을 보지 말고 책에 대해 얘기하는 방법을 책을 살펴 보며 얘기합시다 라고 하는 책을 써낸 것이다.

 

사교 생활을 할 때 결코 한 권의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우리 내부에 구축한 내면 도서관들,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온 생각들과 의사 교환을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자기 얘기를 하면 된다.

 

선생 앞에서의 경우다. 서아프리카에 있는 티브족에게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이야기해주는 로라 브래넌이라는 인류학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무척 재미있다. 로라 브래넌이 티브족에게 햄릿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자,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는 티브족은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망자들이 걸어다닌다는 관념을 믿지 않은 채, 이구 동성으로 죽은 이를 통해 형성하는 이야기의 전개에 이의를 제기하고, 결국은 그들과 공통된 하나의 담론 대상을 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피에르 바야르는 로라 브래넌이 티브족에게 이야기로 들려주는 책의 조각들이 부재 상태의 책을 대체한다고 보았다. 또한 티브족이 가진 내면의 책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으로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피에르 바야르는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과 무관한,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역설적이게도, 텍스트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 티브족으로 하여금 해석 가능한 하나로운 풍요로운 의미를 보다 직접적으로 열게 해준다는 것이다.

 

작가 앞에서의 경우다. 작가가 쓴 자신의 책과 출판사에서 손 본 책의 내용이 확연히 달라, 독자와 작가간의 소통 불가인 내용의 소설을 예로 들었다. 이 역시 책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책을 정확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독자보다 더 나은가 라는 것이다.  몽테뉴의 경우의 예로 들었는데, 그는 일단 글을 쓴 뒤 글로부터 분리되고,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 점에 강력하게 공감한다. 내가 했던 말, 내가 글로 쓴 글이 아주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낯설게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오래 전에 글쓰기라는 개념도 없이 그냥 끼적 끼적 했던 글조차도 인터넷의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의 내면 세계를 훔쳐보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작가의 경우, 다른 작품을 구상하고 떠올리려면 그 작품과 완전히 분리되어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해야 하므로 일관성보다는 다면성이 더 필요한 직업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작품에 푹 빠져서 읽고 또 읽고 그것을 자기화한 독자보다도 자신이 쓴 글의 일부 혹은 전부를 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얘기할 때도 책은 우리의 개인적 환상들에 의해 다시 손질된 조각들, 즉 작가들이 쓴 책들과는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첫째, 부끄러워하지 말것, 둘째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셋째, 책을 꾸며낼 것, 넷째 자기 얘기를 할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맥락의 중요성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상기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그 책에 대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담론 게임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평론가와 출판관계자, 속은 베스트셀러라 위상 속에서 그 책의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을 말한다.

 

책을 꾸며내는 것도 상황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인데, 웃기려고 써놓은 같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탈독서가 우리 일상에 만연해있기 때문에 설사 꾸며낸 부분이 부정확함이 발각된다 하더라도 숱한 기억상의 오류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불과하며 속았다고 생각할 위험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모든 독서에 수반되는 망각을 간과할 떄, 타자가 안다는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주장, 책들에 대한 담론에서 문제의 그 앎이란 불확실한 앎이며, 타자란 우리의 대화 상대들에게 투영된 우리 자신의 불안한 형상이다 라는 점은 다시금 독서 행위와 독서에 수반된 담론의 실체에 대해 결국 독서라는 것이 자아가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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