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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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빠져 내 자신을 잃고 동화되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나도 모르게 거기 등장하는 망나니들과 비슷한 정신연령이 되고, 그들의 생각을 바로 내 생각과 동치시키면서 그들처럼 현실의 굴레 바깥쪽 테두리에서 보다 더 우월한 정신적 세계를 공유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 바흐를 연주하는 글랜 굴드는 바흐만을 대가의 음악으로 여기는 대목을 읽으며 마치 내가 바흐 매니아였던 것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바흐에 대한 몇가지 흐린 기억이 있긴 하다.


어릴 때 피아노를 조금 배워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갑자기 바흐를 맞딱뜨렸을 때의 당혹감을 기억할 것이다.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적으로 멜로디를 주고받는 부분부터가 절망의 시작이다. 우둔한 왼손가락이 오른손이 만들어내던 멜로디를 어떻게 따라할 수 있나. 반대로 리드하던 오른손이 어떻게 왼손이 하던 하찮은 반주에 머무를 수 있나. 리듬이 어떤 일정한 박자의 틀에 갇혀있지 않고 엇박자의 기묘한 조화를 만들어내야 해서 음표를 읽기가 어렵다고 느낀 것도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길 바란다. 어쩌면 피아노를 그만둔 건 바흐 때문일지도 모른다.... 는 개뿔 소질도 없고, 연습도 안해서 진도도 안나가고, 감성도 메마르고, 음악에 대한 이해력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단지 믿을거라곤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 잘 치게 생겼다고 주워들은 말 한마디 뿐.. 유령처럼 생각없이 피아노 가방만 들고 왔다갔다만 하다가, 때가 돼서 그만둔거다. 

 

그래도 남은 게 있어서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어떤 샤프하게 생긴 남자애가 피아노 잘 치는 애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반주를 부탁했다. 평소 으르렁거렸던 것 같은데, 암튼 연습도 해야 하고 하기 싫어 튕기다가 마지못해 해주곤 서로 여기가 틀리니 저기가 틀리니 티격 태격 하던 날들이 갑자기 생각나니 말이다. 어쨌거나 바흐는 어렵다는 인식 말고는 없었는데, 또 젊은 청춘의 어느 날 어떤 놈한테 바흐의 아마도 어떤 플룻 협주곡이었던 것 같은데 테입을 선물받았다. 바흐를 선물한 놈은 바흐의 변주곡처럼 단순해 보이면서도 어렵고 복잡하면서도 어떤 절제의 미덕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바흐는 뭔가 고상하고 있어보이고 절제된 음악이면서 좋아한다고 하면 모짜르트나 베토벤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어쩐지 좀 수준높은 인상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내 의식 속에서 쌋텄을 터이다. 그 후 또다른 작은 기억 하나가 역시 그 싹에 물을 주었을 거다. 영국에서 아기를 키우며 살 때다. 품을 빠져나가 쏜살같이 무릎으로 기어 달리는 아기가 정원의 민들레 꽃을 뜯어먹는 걸 쫓아다닐 때, 이웃집에서 매일 오전 흘러나왔던 피아노 소리가 바흐였다. 그 분은 남편이 못살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영국의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를 사사받던 사람이었다.  바흐를 들으면 바흐의 다른 음악도 그게 바흐라는 걸 안다. 아는 척 했더니 나도 바흐를 좋아해요 라고 했다. 나도 바흐를 좋아해요. 그 말을 적고 나니 그녀가 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연약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형적인 피아니스트와 달리 늘 따뜻하고 푸근한 이웃집 아줌마였었는데 나도 바흐를 좋아해요. 그 말 속에서 줄곳 아닌척 했던 예술가의 내면을 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기를 다루는 데 힘겨워하던 내게 단비같았다. 정원의 아기를 번쩍 들어 매일 집으로 데려가 놀아주고 안아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그러다가 커피도 주고 점심 밥도 주었으며, 설겆이도 못하게 했다. 


글렌은 사실상 <골트베르크 변주곡>과 <푸가의 기법>만 연주했다. 브람스라든가 모차르트, 쉔베르크나 베베른처럼 다른 작품을 연주할 때도 말이다. 


글랜은 쇼팽 따위는 절대 연주하지 않았다. 그런 초청은 거액의 사례금을 준다 해도 거절했다. 41


이 소설 속의 망나니같은 천재들은 모짜르트와 베토벤은 경멸하고 바흐만을 좋아했다. 나도 모짜르트와 베토벤을 경멸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지만, 소설 속 글랜굴드, 화자, 베르트하이므 이 세 사람의 대화와 생각에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아니 없는 동질감을 만들어내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마치 그들 만큼이나 바흐를 잘 알고 있는 것같은 착각에 빠져본다.

 

비단 바흐 뿐만 아니다. 그들은 시골을 싫어하는데, 나 역시 시골을 그닥 엄청 좋아했던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시골의 한적한 풍경을 증오하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과 점점 한통속이 되어간다. 게다가 번역자님의 독특한 'OO하지'체는 입에 착착 감긴다.  


원한다면 완전히 익명으로 살아갈 수도 있는 도시에 비해 시골에서는 지금도 앞으로도 이 세상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훨씬 더 매몰찬 방식으로 접하게 되지. 시골에서는 끔찍하고 불쾌한 일들이 정면으로 들이닥치고 . 중략. 우리를 틀림없이 파멸시킬거야.138


나는 사실 자연이 싫어. 라고 그는 늘 말했다. 나는 글렌의 그 말을 내 것으로 만들어 지금까지도 되뇌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되뇌겠거니 생각했다. 글렌은 자연은 내게 적대적이야. 라고 말했다.81


김중혁을 좋아하는 딱 한 가지 이유를 대라면 아마도 그의 소설집 1F1B에서 했던 말,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앞으로도 이 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 라는 글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내게로 스며와 고인 내 마음 속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시와 시골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는 생각을 대변하고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것의 추구에 대한 내 목마른 목을 축여주었다. 


그런데 베른하르트는 전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틈틈히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시골증오론과 함께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 증오론 펼친다. 조국 증오론 역시 나른한 바이러스처럼 나를 덮는다. 나치즘의 유령이 청산되지 않은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권력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과 21세기 대한민국, 300명의 아이들을 한 명도 못구하고 깊은 바닷속에 수장시킨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 것 중 무엇이 더 증오스러운가. 내가 발딛고 서 있는 그 땅을 증오하고 나의 역사와 나의 조국을 경멸하는 것. 그것들은 사실 나 자신을 향해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그런 행위들이기에 자학의 비감과 통쾌함이 동시에 살아난다. 비난의 화살은 결국엔 나를 향해 돌아오지 않는가. 바흐를 선물한 복잡한 남자는 바흐를 지우고 이제 목가적 삶을 원한다. 속된 나는 이미 바흐에 대한 환상과 함께 덜렁 혼자 남겨진 느낌이다. 나는 훗날 속된 도시에서 혼자 남겨져 고독한 실존의 무게를 노후와 함께 짊어지게 될까, 증오하는 시골을 따라 저벅저벅 바흐를 선물했던 남자를 따라 그의 그림자 밑으로 들어가게 될까. 어쨌든 바흐를 잊은 시대에 바흐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스스로 피아노가 되어 죽은 글랜굴드만큼이나 비극적이다. 

 

아포리즘에 대한 증오 역시 내게 반갑게 걸어 왔다. 짧은 글이 어떤 철학적 명제를 주는 것 같지만, 문자중독과 난독을 동시에 가진 나는 말로 설명된 것, 친절한 것, 공감할 수 있지만 풍부한 예시와 내용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때때로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는 문장을 가지고 씨름을 하거나 포기하고 넘어가는 일은 자학에 가깝다. 그러나 가슴에 꽂히는 것 같은 날카로운 한 마디 말은 위대한 철학을 완성한 사람의 전체를 축약시켰을 때에나 의미있을 것이다. 광고 카피같은 한 문장들이 삶을 지탱할 철학이 될 수는 없다. 언제나처럼 자신이 하는 일을 멸시하는 베르트하이머는 스스로 문장을 만들고 철학을 하면서 아포리즘을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자조한다.


나는 아포리즘 따위나 쓴다구... 그건 정신적 호흡이 짧은 저급 예술이야. 특히 프랑스에 살았던 어떤 이들이 생계를 위해 만들어낸 예술, 말하자면 야근하는 간호사들이나 읽을 법한 가짜 철학, 달력 명언에 지나지 않는 시시한 철학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 나중에 의료기관의 대기실마다 붙어있는 명언으로만 남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읽을 수 있겠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든 긍정적인 평가를 받든 아포리스트로 불리는 작자는 다 역겨워.


그렇게 말하면서도 베르트하이머는 자신은 아포리즘을 못 끊겠다고, 그동안 써놓은 것만도 수백만 개에 달하는데, 괴테나 리히텐베르크같은 사람들이 쓴 것처럼 자신이 쓴 것들도 병실이나 사제관의 벽에 도배되어 있는 꼴은 못보겠다며 글랜의 천재성 때문에 피아노를 버린 자신은 결국은 철학자가 될 운명은 아닌지라 철학자 지망생이 되고 말았노라고 자학하고 한탄했다. 


이 남자들, 글랜굴드 때문에 피아노를 포기했다고 하는 베르트하이머와 '나'는 스스로를 철저히 증오하고, 자신을 밟아 깔아 뭉갬으로써 삶의 동력을 얻는 사람들이다. 피아노를 포기한 두 사람 중 베르트하이머는 정신과학으로, '나'는 철학으로 업을 바꾸고, 값비싼 최고급 피아노를 피아노 연습으로 점철된 긴 시간동안의 연습 기간만큼 아무렇게나 버리고 나서 그저 글랜을 숭배하는 일로, 글랜의 천재성에 기인한 기이함마저도 감탄하고, 글랜굴드의 죽음마저 미화시킨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 이미 20대에 완성된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완성하다가, 스스로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되었다. (소설 속에서, 실제로는 아님)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건 순전히 가족의 잘못이라고 끊임없이 책망했으며 가족이 자신을 이처럼 끔찍한 실존이라는 기계 속으로 던져 넣고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기계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저항은 소용없어. 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실존 기계 속으로 던져넣으면 아버지가 아이를 부지런히 토막내는 그 기계를 평생 가동시켜 온 것이라 했다.(p45)

소원이라는 건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집중 할 때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건데 말이야, 난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 못 받았다고, 라고 그는 말했다. 자기는 어릴 적부터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거기에 온 힘을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자기는 애당초 모든 것이 모든 이들이 혐오스기만 한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48


서사가 없는 소설, 소설이면서 '산문의 언덕 너머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며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로 불렀던 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 이어 그의 작품을 접하니 특유의 과장된 표현과 반복적 서술이  친근해져서 곳곳에서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 파괴자의 소설에서 생각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찾으려면 숨바꼭질 놀이를 해야한다. 소설의 실제 얘기는 화자인 내가 여관에 들어가면서 시작해서, 자고 나와 자살한 친구 베르트하이머가 살던 트라히의 사냥 별장에서 주인공 별장 관리인을 만나 그가 행했던 마지막 기이하고 광기어린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끝난다. 생각이 아닌 걸 찾아내려면 문장 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해야 한다. 책을 시작해서 끝내는 동안 내내 '나'는 생각한다. 여관을 들어가면서 조촐했던 장례식과 결혼해서 자신을 떠난 여동생의 대한 비열한 방식의 복수로서 스위스의 치처스까지 가서 그 집 부근에서 목을 매 자살한 베르트하이머를 생각하고,  여관의 냄새나는 낡은 방안에 앉아 네 번이나 편지를 써서 그를 불렀지만 끝까지 그를 외면했던 스스로를 생각하며 변명하고, 더러운 주방 유리문을 바라보면서 글랜굴드의 천재성에 대해 생각하고, 먼지쌓인 객실 안에서 글렌굴드와의 학창 시절을 생각하고, 여관주인과 베르트하이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이한 방식으로 여동생을 구속하며 사랑했던 베르트하이머를 떠올리고 그렇게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물이 흐르듯, 파도가 치듯 하나의 주제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이어졌다가 또 그 파도를 타고 다시 되돌아와서 앞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반복한다. 


 우리는 늘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출발하잖아,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무엇인가에 접근하려는 순간 우리는 각 분야마다 주어진 어마어마한 자료에 빠져 질식하고 말지,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정신적 문제에 거듭 다가가고 불가능한 일, 즉 정신적 산물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이 얼마나 정신나간 짓이야.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오해 속에서 헤매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런 오해해서 못 벗어나잖아,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어, 하지만 이런 건 누구나 하는 관찰이지, 그의 말을 생각했다. 누구나 쉴 새 없이 말을 하면서 오해를 사잖아, 최소한 이런 점에서만큼은 모두가 서로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지, 나는 그의 말이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를 오해의 세상에 낳은 것도 오해이며 세상이 오해로 짜여 있어야만 우리는 오해의 세상을 견딜 수 있고 다시 세상을 떠나는 것도 큰 오해 때문이지. 죽음보다 더 큰 오해는 없으니까 70


조국을 버리고 마드리드에서 20년간 살고 있던 화자는 빈에 방문했다가 학창시절 호로비츠 밑에서 함께 수학했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와 친구였던 또다른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스위스의 쿠어의 장례식을 방문한다. 그의 생각은 그들이 처음 음악학교인 모짜르테움에서 만났을 때, 그들 자신도 최고의 연주자이던 그 때 천재인 글렌굴드의 골트베르그 변주곡을 한 번 듣고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둘 다 음악을 포기하고 비싼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던져버리고는 다른 삶을 살아갔던 두 사람, 즉 자신과 베르트하이머의 삶에 대한 성찰이자 생전에 그를 외면했던 죄책감을 상쇄시키려는 시도다.  목숨과도 같았던 값비싼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어떤 교사의 딸에게 줘버리고는 철학자가 되어 마드리드에 정착해서 글렘굴드론을 집필하던 그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달라던 편지를 네번이나 무시하다가 결국 갈 수 없다는 거절의 편지를 보낸 것이 그와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한 때는 피아노에 모든 것을 걸었던 두 청년.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 위하여 그 칙칙한 시간들을 견뎌내고 이제 찰츠부르크의 어디에서도 알아주는 음악가가 되었을 때 맞닥뜨린 글랜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한 소절. 그리고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자괴감이 어떻게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는지에, 오로지 음악적 완성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빠르게 절망으로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소설은 집중한다. 그들이 음악을 포기하는 데 일조를 했을 수많은 다른 자잘한 이유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다. 화자의 족적은 하루 동안 겨우 몇 밀로미터 반경 내로 제한되고, 그 짧은 동안의 일들 속에 베르트하이머와 얽힌 기억과 자신의 생각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현재 어디쯤에서 무얼 하며 이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게임을 하듯 잘 따져보아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중단 하기를 반복하고 수십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쓰레기 더미에 내다 버린다 17

  잘츠부르크에서 호로비츠 수업을 들을 때처럼 글랜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몇년도 아니고 10년을 말이다. 중략.  글랜은 베르트하이머를 친애하는 몰락자라는 말로 맞이했다. 19


따지고 보면 나는 피아노 대가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모짜르테움이나 그곳과 관련된 것은, 세상이 정말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고 또 일찍부터 삶에 넌더리가 나 있던 나 자신을 구제하기위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58

몰락의 시작은 글랜굴드였지만, '나'는 어찌되었건 세상을 향한 증오를 동력으로 '글랜굴드론'이라는 책을 몇년 째 집필하면서 철학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학으로 전공을 바꾼 베르트하이머는 글랜굴드와의 조우를 계기로 마치 의도한 것같은 완벽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현실이 비루하면 견뎌야 하고, 견딤 속에서 소망을 버리면 마치 편안한 안식을 찾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잇는 것처럼, 하루하루 몰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삶 또한 그렇게 끔찍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멋져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태초에 불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인간이란 그런 자기 파멸적인 욕망을 함께 부여받은 건 아닌가.


인생의 비참함과 막다른 상태가 묘사되고 무의미함이나 쓸모없음이 묘사되는, 모든게 파멸로 치닫고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책들, 그래서 베르트하이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계승자들을 가장 사랑했고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러시아 문학은 무조건 사랑했으며, 기분을 저조하게 만드는 프랑스 철학자들도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의학 서적을 가장 즐기고 탐독한 베르트하이머는 종합병원이나나 병원 양로원이나 영안실을 자주 찾아갔다. 종합병원이나이나 병원 양노원이나 영안실을 무서워 했으면서도 그곳을 부지런히 드나 들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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