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식당 -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중앙M&B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빠른 변화를 수용해야 살아남는 21세기 디지털 사회지만, 변하면 망하는 곳이 있다. 오래된 것, 낡은 것의 가치가 기억과 함께 저물어 추억이 되지 않고, 오래된 것 그대로가 오히려 현재를 이어주는 곳. 바로 노포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맛에 대한 감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처음 먹어본 어떤 음식의 강렬한 맛과 향기는 기억을 환기시키고 향수를 자극하는 가장 근원적인 감각이다. 정직하고 진실한 맛을 잊을 수 없어서 한 번 찾고, 두 번 찾아 단골이 된 식당, 그 곳의 맛이 변하면 고객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한 때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식당은 노포가 되기 전에 망한다. 이것이 변하면 망하는 식당의 법칙이다. 


노포란 오래된 가게를 말한다. 일본과 유럽엔 100년된 식당, 100년된 동네 가게와 100년된 수공예 기업도 있다지만, 갑작스런 문호 개방과 일제의 침탈과 전쟁과 군사 쿠테타와 독재와 민주항쟁과 IMF를 빠르게 진행된 산업화와 함께 견뎠어야 했던 100년의 지난 역사 속에 100년 노포를 견디게 할 만한 힘은 없었다. 오골오골 벌레가 기어나올 것 같지는 않은지, 길거리에는 적어도 수십년은 지났어야 어울릴 Since라는 표기에 1997 혹은 2001 같은 숫자를 써넣은 식당을 볼 수 있을만큼 한국에서 대를 이어 오랫동안 지켜온 식당을 찾는 것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100년된 식당은 없다. 해방 전에 생긴 식당 중 1930년대 식당들이 그중 가장 오래된 식당들이다. 이렇게 오래된 노포들은 서울 중구와 종로에 모여 있다. 저자 요리사이자 음식관련 책들을 출간하는 저자 박찬일은 노포들을 찾아 직접 취재하고 그 집에 얽힌 사연, 역사, 맛의 비결 등을 민속사적인 자료들과 함께 취재해서 책을 냈다. 식당 하나 하나마다의 사연과 스토리를 꼼꼼하게 다루고 있어 많은 식당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16개 노포 중 서울에 위치한 곳이 8곳이고 대구와 부산 등 지방이 나머지이다. 대부분 식당이나 어묵과 국수 공장, 그리고 빵집을 포함한다. 


서울 중구에서는 1946년 생긴 이래 순메밀로 만든 평양 냉면을 파는 우래옥, 1960년부터 시작하여 남대문 근처에서 아직까지 6500원이라는 부담 없는 가격으로 평양 냉면을 파는 부원 면옥이 소개되었다. 종로에도 세 군데나 되는데, 1961년부터 족발을 팔기 시작, 오로지 족발,간장, 생강, 파, 양파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고 비결이라면 40년된 씨육수로 삶아낸다는 평안도 족발집,  서울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노포로 추탕과 미꾸라지 튀김을 파는 용금옥과 since 1933년 오랜 전통의 설렁탕 전문점 잼배옥, 조선시대부터의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종로 1가와 3가 사이 피맛골에서 둥지를 틀었으나 르미에르 종로타운 재개발로 이 이제는 흔적조차 사라진 역사를 간직한 가슴아픈 사연의 청진옥(해장국, since 1937)이 소개되었다. 서울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1953년 생겨 연탄불로 정확하게 나폴리 피자 협회에서 결정한 피자 오븐 온도와 동일하게 485도의 고화력으로 갈비를 굽고, 얼른 서서 뚝딱 술한잔과 함께 속을 채우고 나갈 수 있게 지켜온 연남동 마포 서서갈비다. 정리해보면, 서울은 대개 탕을 중심으로 노포가 남아있고, 해방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월남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냉면과 족발 같은 평양 음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구에서는 육개장을 파는 옛집식당이(since1953)과 추어탕 전문점 상주식당(since  1957)을 골랐다. 전쟁의 영향으로 부산까지 피란했던 우리의 할머니들은 부산에 둥지를 틀었고, 일본 문화를 많이 수용했던 부산에는 서을과는 다른 풍경으로 남은 노포들이 많다. 그 옛날부터 대기 줄이 하도 길어 빨리 먹고 가라고 달리기 이름인 마라톤이라는 안주 이름을 손님들이 지어준 선술집 마라톤집은 1959년에 생겼고, 해운대 소문난 암소갈비는 1964년에 생긴 노포다. 대기업의 어묵 사업에 시장의 모든 수제 어묵집들이 불량식품이니 뭐니 하는 노골적인 탄압에 백기를 들었을 때에도 맛으로 살아남은 since 1953의 삼진 수제 어묵 공장 및 박물관은 다음 번 부산 여행 때 꼭 들려봐야겠다. 


빵집으로 롤 카스테라, 찹쌀떡이 특화되어 있는 순천의 화월당(since 1945) 이 소개되었고 해풍에 말려 공장에서는 흉내도 몬내는 쫄깃하고 매끄러운 맛을 간직한 경북 포항의 제일 국수 공장(1971년)도 함께소개 되었다.  제주에 담달에 갈 작정인데, 1978년부터 제주향토음식을 팔기 시작했다는 도라지 식당과 1964년부터 순대국밥을 팔아온 광명식당을 방문해야 겠다. 


이렇게 오랜 질곡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노포들의 특징은 첫째 변함없이 맛있다는 점, 둘째, 주인이 바뀌지 않고 대를 이어 하고 있다는 점, 셋째 직원들이 오랫동안 근무한다는 점이다. 숱한 시련의 시간 속에 때로 메뉴를 바꾸었어야 하기도 했고 때로, 강제 이사를 가야 했고, 또 때로 거의 폐점 직전에까지 가기도 했다. 우리가 노포를 인정하고 오래된 골목길과 오래된 식당들 오래된 것들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고직 몇년 사이이다.  그 전까지 우리 스스로를 만들어온 정체성을 외면하고 새 것,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 반짝반짝하고 윤이나고 네모 반듯한 것들만을 세련되고 현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왔고, 그것에 대한 결과로 이렇게 초라한 숫자로 남은 노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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