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비극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읽은 정통 추리 소설이었다. 1932년작. 80여년이 넘은 시간이 흐르고, 몇 대에 걸쳐 미스테리 소설의 진보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도 여전히 흥미롭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 시간이 가치를 증명한 것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쪽 시간과 이쪽 시간 사이의 간극이 몰입을 방해하는 것과, 흥미를 촉발하는 것이 있다. 전자는 문학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와  지식이란 이름으로 단편화된 조각 정보들이 교과서와 지적인 대화 사이를 구름처럼 떠돈다.  후자는 그냥 조용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추리소설 팬이 아니라서, 교과서에서 본 적이 없어서 잘 알고 있던 작가가 아니었지만, 읽고 나서 알아 보니 엄청 읽혔다. 수많은 버전의 다른 출간본이 있고, 많은 이들이 번역을 했고, 많은 독자들이 리뷰를 했다.

 

두 명의 저자 x 두 개의 필명 x 두 개의 페르소나

소설의 저자와 주인공에 얽힌 이야기는 추리 소설 못지 않게 흥미롭다. 원래 이 책은 바너비 로스 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물리적 저자는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라는 쌍동이처럼 닮은 동갑의 사촌 형제이다. 앨러리퀸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필명이자, 주인공 탐정의 이름이며, 두 사람의 페르소나다.  그런데, 리와 다네이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또 하나의 필명이 있었으니 그것이 드루리 레인을 주인공으로 택한 바너비 로스이다. 둘이 하나인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공개석상에서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개구장이 같은 행동들을 즐겼다고 한다. 미스터리와 위트 가득한 삶을 영위했던 그들이다. 바너비 로스의 생은 고작 3년이었다. 출판사와의 저작권 분쟁으로 바너비 로스는 x,y,z의 비극 등 그들의 지적이고 고뇌에 찬 햄릿 스타일의 드루리 레인을 탐정 주인공으로 한 많지 않은 작품을 던져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신중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전직 배우는, 실존했던 작가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의 감추어진 또 다른 자아, 깊이 내재된 보이지 않는 분신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기록으로는 그들의 페르소나는 엘러리 퀸이었고, 드루리 레인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고 한다. 

 

둘이서 하나의 소설을 쓰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글과 그림을 따로 써서 하나의 동화책을 엮는 것처럼, 글의 논리적 전개와 스토리, 그리고 문장을 분리해서 각자 역할 분담을 했을까. 그렇게 역할 분담을 했더라도 최종적으로 글을 쓰려면 머리 속에 굴러다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일관된 문장 속에 배열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곰곰히 함께 스토리 구조를 짜내고 하나씩 하나씩 그 디테일을 상의해 가며 한 문장 한 문장 함께 완성했을까.  초기에 그 둘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졌으므로 시간이 그렇게 충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워낙 많은 작품을 써냈기에 많은 것을 조율해서 쓰는 일은 더욱 어려웠을 듯하다. 그렇다면 모든 스토리를 함께 짜고 일정을 맞추기 위해 부분부분 챕터별로 나누어 병렬로 동시에 쓰는 작업을 진행했을까. 알쏭달쏭한 두 사람의 탐정소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당신은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시체다. 불우한 해터가의 주인, 화학자, 요크 해터씨다. 석연치 않은 자살 판정.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서막에 불과했다. 몇달 후 해터가에서는 루이자를 겨냥한 또다른 살인 미수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 발생한다. 어두운 광기에 휩싸인 해터 가의 저택이 공간적 배경의 전부이다. 독자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으스스한 저택에 괴이한 해터가의 자식들과 함께 갇혀 답답하다. 용의자이자, 잠재적 피해자이자, 새로운 사건의 잠재적 범인인 해터가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외출금지령이 떨어지고, 여러 명의 경찰이 구석구석 배치된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 두 딸과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루이자, 가정교사, 운전사, 하녀 등 그 집에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한 발작도 떠나지 못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결정적인 알리바이들이 있다. 사건을 담당한 섬 경감도 감시와 사건 해결을 위해 해터가를 떠나지 않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만, 그가 있는 동안에도 루이자를 향한 살인 미수극은 계속된다. 드루리 레인은 섬 경감이 의지하고 있는 민간인으로, 타고난 직관으로 논리적인 사고력으로 문제 해결을 하는 인물로, 한물 간 퇴역 배우이다.  그 역시 청각 장애인이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하나의 감각을 상쇄시키는 또다른 감각을 주었다. 논리적 추리력, 직관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범인을 아예 못맞춘 것이 아니었다.  '아 그럴 줄 알았어'가 아니라 '설마' 했던 거다. 모든 단서가 처음부터 정확하게 오차 없이 범인을 향해 있었고, 출간 당시 바너비 로스라는 이름을 썼던 저자는 숨김없이 그것을 꼼꼼하게 독자에게 알렸다. 알아가는 과정 자체에 인간의 차가운 본성에 또한번 굴복해야 하는  윤리적 이슈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단서가 가리키는 모든 힌트들을 부정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루이자는 시청각장애인이다. 추리 소설에 헬렌 켈러 드라마를 소재로 쓸  이유도 없는데 그녀가 등장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증언이 문제 해결의 열쇠다. 

보통의 우리가 시각과 청각에 의지하는 양 만큼 루이자의 다른 감각은 발달할 수 밖에 없다. 목격자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녀의 나머지 감각이 있다. 저자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루이자의 초감각적인 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독자(나)는 독자가 경험한 것, 독자가 알고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손에 쥐어주는 사건의 단초를 흘려 버린다.  거기에 설마 하는 마음. 불편한 마음을 제거하고 그 설마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단서가 제시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한다. 차단할 수밖에 없다.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타락과 부패를 묵도해  온 경찰이라 해도 그렇게 목격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교육받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미스터리나 탐정 장르 소설은 소소한 일성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의 가장 극한까지 상황을 몰고 가기 때문에 개연성이 부족해지기 쉽다. 납치나 살인과 같은 사건의 원인은 현실에서는 대개 금전적인 이유나 원한 관계가 대부분이어서 진부해지거나 작위적이기 쉽다. 내가 추리소설을 많이 안읽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 소설은 그같은 우려는 밀쳐버리고 다른 종류의 고뇌를 안겨준다. 인간 본성과 죄의 근원에 대해 성찰이 요구되는 이 소설은, 나에게는  사실 드루리 레인의 윤리적 선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돈스럽게 한다. 주인공인 그의 결정이 독자인 나의 결정과 언제나 같을 수만은 없다. 그의 선택에 윤리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선택이 있을까. 

사건 종료 후, 레인은 섬 경감과 부르노 검사에게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충분히 변호할 기회를 갖는다. 만일 범인을 확신하였을 때 이를 알렸다면 초래할 수 있었던 결과에 대해 그가 고뇌했던 이유들 때문에 그는 면죄부를 갖는다. 한 사람의 한 때의 잘못이 꼬리를 끊지 못하고 그대로 혈통으로 이어져 자식과 그 자식에게 그대로 되물림되고, 결국 돌고 도는 관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드루리 레인은 비통해한다. 그렇다. 나의 악하거나 약한 유전자는 선조로부터 온다. 그건 맞다. 유전자는 승자이다. 레인이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찝찝하다.  유전자의 결함이 어떤 특정한 질병 때문이었을 때, 그 결함이 일으키는 모든 악행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영원히 개인의 몫이다. 사회의 몫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들,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건드리며 드루리 레인이 내린 결론을 유예하기엔 우리가 믿고 있는,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가치가 때로 허황되고 근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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