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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종이가 곁에 있을 땐, 그 쓰임새에 대해 무심해서 몰랐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는 참으로 수세기동안, 특히 우리들의 스마트한 디지털 세대가 종이를 잠식하기 바로 방금 전의 세기까지 가장 풍부하게 종이를 누리고, 종이를 종같이 부리고 학대하며, 종이와 함께 살아왔다.
이제 종이가 떠나가려나, 종이에 대한 애가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다. 갑자기 슬퍼지려고 한다. 종이엔 우리의 정신이 알알이 배겨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정신이, 내면이 머물 곳은 종이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이제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나. 원고지나 노트에 소설을 쓰는 폴 오스터를 오래된 박물관의 구석기 유물을 보듯 신기해하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우리는 종이에 긴 글을 쓰는 방법을 잊어버렸고, 환한 모니터의 불빛을 온 얼굴로 맞아야 생각들이 텍스트로 기어나오며, 아이들은 손글씨를 삐뚤빼뚤 알아볼 수도 없게 써도 무심히 넘겨야 하고, 화면에 쓰일 예쁜 글자체를 디지털 머니를 주고 구입하는 세상이 우리도 모르게 지배하게 되었다. 디지털 원주민인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종이에 박힌 글자들에 대해 우리 성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종이는 언젠가 빛바랜 노스텔지아가 될까
종이가 꼭 글씨들과 쌍으로 엮일 필요는 없다. 조금은 뜬금없게도, 이 책은 종이의 쓰임에 대한 글을 지도에서부터 찾기 시작한다. 종이가 장소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빼곡히 채워넣은 지도를 담았을 때 본격적인 인류의 대탐사가 세계를 대대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책은 종이의 목적 자체이기도 했다. 사상을 전달하고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인간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인류 역사를 변화시켜 왓다. 과학 혁명, 종교개혁, 구체제의 몰락, 자분주의의 부상, 공산주의의 몰락, 그리고 그 사이 역사의 동력이 되는 텍스트를 담고 있었으니 세계를 지배한 건 무기 이전의 정신 자각 분노 깨우침 뭐 그런 거니까. 구텐베르크 이래 책과 거의 동일시 해 온 종이는 인류가 오랜동안 쌓아온 지성을 담는 그릇이다. 지폐의 사용 이후 경제 역시 종이 위에 세워졌고, 금융상품도 종이 위의 숫자로 구성된 것들이다. 필요가 발명을 낳듯, 지폐의 통용은 9세기 구리가 부족해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인류를 물질적 삶을 지탱하는 경제는 지폐로 인한 버블과 붕괴의 역사이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는 상품 위에 붙여놓은 종이 상표와 포스터와 아파트 입구로 쑤셔넣어진 각종 상품과 세일과 배달 음식점의 광고 전단지들의 홍수 속에 있으며, 상점의 유리벽에 각종 세일과 행사를 알리는 종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빛 속을 걷는다. 종이는 건축과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쓰였으며, 일본의 전통 놀이(?)라고 잘못 알려진 오리가미 종이접기는 사실 서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일본에서 발전시켜 다시 역수입된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문구점에서 파는, 서양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색종이들을 떠올린다. 여권과 같은 신분증은 물론, 두 나라 사이의 주요 협정도 종이 위에 쓰여진다.
이러한 종이 기반의 모든 것들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디지털화되어 왔지만, 아직 애도할 시점은 아니다. 크레딧 카드와 전자화폐가 지폐를 대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정겨운 재래시장에서 현금없이 콩나물을 살 수 없다. 킨들과 크레마가 앞다투어 전자책을 출판하고 있고, 차안에 굴러다니던 각종 지도책은 오래 전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이제 네비 없이는 통근을 못하고, 스트릿뷰어로 확인하지 않고는 약속잡는 일을 삼가하는 동안에도 새로운 곳을 여행할 때에는 여행안내소에 들어가서 그곳의 안내 책자와 지도를 받아 들고 나온다. 끊임없이 스마트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책상에는 교과서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종이시험지의 문제들을 풀어 성적을 평가받고, 책읽는 어른들도 아직 이렇게 건재하지 않은가.
정신문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종이가 실은 환경을 무참히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흔히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비닐 봉지를 꼽기에, 마트에서는 종이봉투를 구입하는데 종이가 이에 못지 않다. 오늘날 산업용으로 벌목한 목재 가운데 절반 가량이 제지용 펄프로 쓰이고, A4 용지 한 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구 하나를 한 시간 동안 켜놓을 때만큼의 온실가스가 배출될 뿐 아니라 물도 한 컵이나 사용된다고 하니 아무렇게나 휘갈겨 없어지는 A4 용지 한장에 애도를 불러야겠다. 그런데 환경보호와 같은 선의의 주제에 대한 책을 모으는 장서가들도 결국 환경파괴자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러니는 어찌할 것인가. 너도나도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종이책 출판 산업은 환경 파괴 산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러니는 또 어쩔 것인가.
저자 이언 샌섬은 신발 밑창이 너덜너덜 떨어지는 걸 본드로 이리저리 붙여가며 신고 다니면서도 책 한권의 저술로 생긴 선인세로 한질의 책을 사는데 써버리는 장서가이다. 폭넓은 지식을 전방위로 휘두르며 기관총처럼 거침없는 지식을 난사하는 글쓰기가 움베르토 에코를 연상케하기도 하지만, 어렵지는 않게 읽힌다. 주위를 살펴본다. 온통 종이로 된 것들이로구나. 달력, 3M 포스트잇, 흩날리는 A4 용지들, 영수증, 지갑의 현금 약간과 상품권, 쌓여잇는 책들, 상품의 박스, 상자들.... 아직 애도할 때가 아니다. 종이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고 있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