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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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빛이 차단되어 캄캄한 암실은 비밀이 봉인된 곳이다. 그 곳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애초부터 규칙이 그랬다. 금단의 열매는 탐스럽게 익어 향기를 뿌리지만 먹을 수 없다는 것, 먹으면 자멸을 초래한다는 것. 모든 금단의 구역, 금단의 열매에 대한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가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하지 말하야 할 것을 말함으로써 비극적 신화가 완성된다. 그녀들이 암실에 들어서는 순간은 마지막 절제된 욕망의 끝에서 금단의 열매를 향해 손을 뻗치는 행위였다. 누구나 그것을 알지만, 그곳은 어서 들어오라고, 어서 먹어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러나,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허락되지 않은 것을 알고도 문과 문 사이의 경계를 넘는 순간 그녀들은 돌이킬 수 없는 암실에 갇힌다. 허락되지 않은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비극이 잉태된다. 비밀은 지켜져야 안전하다. 사랑도 거리가 유지된다. 규칙을 어기는 것은 신뢰를 깨는 것이고, 신뢰를 깨는 순간은 사랑이 깨지는 순간이자, 망상적 변태 귀족 돈 엘레미리오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딱 세 사람. 사튀르닌의 친구 코린이 한 번 깜짝 출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튀르닌과 돈 엘레미리오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지문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대화다. 배경은 역시 돈 엘레미르오의 식탁으로 제한된다. 외부 출입을 20년간 하지 않고 은둔해서 살고 있는 스페인 귀족 출신의 부자 독신남이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여성과 식탁에서 대화하는 내용이다. 대화가 스토리를 이끌고 대화가 스토리를 끝낸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요원한 일인 듯하다. 벨기에 출신의 이 여자는 일자리를 찾아 파리까지 와서 비정규직 보조교사 자리를 하나를 따낸 것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보조 교사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는 파리의 높은 방세를 지불하는 대신 담배냄새 쩌는 코린의 소파에서 지내던 사튀르닌은 월 오백 유로의 저렴한 가격에 40제곱미터의 환상적인 방 광고를 발견한다. 파리에선 방을 얻기 위해 인터뷰도 하는 모양. 그러나 인터뷰장에 모인 사람들은 연쇄살인범이자 스페인 귀족인 돈 엘레미리오의 면상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다. 인터뷰 대기실에서 그녀는 그 호화로운 주택에 세들어 살았던 8명의 여성이 모두 사라졌으며 아마도 살해되었음을 알게 되지만, 개의치 않고 세들어 살기로 결정한다.

 

여긴 내가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의 문이오. 잠겨 있진 않소. 신뢰의 문제니까. 물론 이 방에 들어가는 건 금지요. 당신이 이 방을 들어놓는다면 내가 알게 될 거고 당신은 크게 후회하게 될 거요

욕실이 딸린 호화로운 방과 매일 저녁 초대되는 만찬, 샴페인으로 가득 채워진 냉장고, 매일  뽀송뽀송한 새 시트로 갈아지는 침실과 암실을 제외하고는 어느 공간이든 마음대로 사용하고 둘러볼 수 있는 자유. 게다가 돈 엘레미리오는 첫눈에 이미 그녀를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당돌한 그녀의 조롱과 멸시에 찬 독설을 더욱 매력으로 수용한다. 그녀를 향해 퍼붓는 뜨겁고 달콤한 애정 공세 속에, 사튀르네는 절대 넘어가지 말리라 다짐했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가는 걸 느낀다. 

 

당신에겐 어느 누구도 발을 들여놓은 해서는 안되는 암실이 있어요.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 그건 제 암실이에요.

 

누구나 자신의 비밀을 자기가 원하는 곳에 갔다 놔요 62

자. 여기 평생 보장되는 호화로운 생활과 감미로운 사랑이 있다. 젖과 꿀이 넘쳐나는 천국 같은 곳, 아늑한 경제적 환락과 자신에게 도취된 남자의 헌신이 보장된 곳이다. 암실 문만 열지 않으면 된다. 암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 만큼의 거리만 지켜준다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남자가 지어준 마치 금으로 된 것과 같은 황금색 벨벳 치마를 두르고 그의 구석구석 치마 안감을 세심하게 손질한 손길을 느끼며 포옹과도 같은 안락함에 젖어들면서,  그녀는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할 결정의 시간이 다가온다.


암실의 비밀을 가진 사람은 돈 엘레미리오인데, 비밀을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사튀르닌이다. 그녀는 진실을 마주치기가 두렵다. 사라진 8명의 여자들은 죽지 않았을꺼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함으로써 돈 엘레미르오에 대한 달콤한 시간을 연장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하는 돈 엘레미르오. 그에게서 죽음이란 단어가 나오자, 이제 다시 그녀는 그 남자가 죽인 것은 아닐 거라는 소망을 만들어낸다. 사튀르닌은 자신을 위해 금빛 벨벳 스커트를 지어주고, 최고급 샴페인을 냉장고 가득 채워넣고, 최고급 요리로 매일 저녁 만찬을 준비하는 돈 엘레미리오가 살인자가 아니기를 소망했기에, 그의 비밀, 그의 암실, 자신처럼 그의 방에 세들었다가 사라진 8명의 여자들에 대해 외면하지만, 진실은 한 발 한 발 다가온다.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현대판 성인 동화같은 소설이다. 마지막 순간 사튀르닌은 금으로 변한다. 사랑의 완성을 뜻하는 걸까. 사튀르닌은  돈 엘레미리오가 사랑의 완성을 위해 남겨놓았던 마지막 색깔 황금의 노란색이다. 그는 금을 찬미했고, 사튀르닌을  그녀를 영원히 품고 싶어했다. 그렇게 금으로 변하는 순간 사튀르닌과 돈 엘레미르아는 동화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푸른 수염 원작의 현대판 동화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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