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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내 그럴 줄 알았어. 이야기가 전개가 절정을 치달을 무렵 나는 책장을 싱경질적으로 마구마구 넘겼다. 이게 뭐야. 뭔가 대단한 반전을 기대했는데, 뻔한 사기극이었잖아. 물론 술렁술렁 읽어 넘긴 후 결론을 읽고 나서 프리다가 사기치던 앞부분은 제대로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나서 옮긴이의 읽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차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오래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I don't wanna talk about it, how you broke my heart, if you stay..."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되었나요?"
삶이란 뭔가 일이 일어나는 기간을 일컫는다는듯한 말투였다
끝... 그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년에, 아직 첫사랑의 설레임마저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노년에, 아직 사유의 자유가 영혼을 떠나지 않은 노년에, 아직 기쁨과 슬픔과 아픔과 상처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노년에, 생각만큼은 날개를 달고 멀리 멀리 어릴 적 자랐던 그 먼 시공을 가까이 고스란히 품고, 하루 하루 아직 뭔가가 더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고 눈을 뜨는 그 끝나지 않은 노년에.. 요양사 프리다는 이미 "끝난 것"에 대해서만 묻고 있었다.
끝은.. 끝이란 건.. 설령 그게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멀리'에 있다. 필립로스는 <에브리맨>에서 노년은 전투다 라고 했던가. 그렇게 하루하루를 싸워 나가는 거다. 저벅저벅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걸어가면서, 살아왔던 기간에 반비례한 기간만큼 먼 기억을 더욱 가까이 느끼며, 살아왔던 인생만이 전부가 아니고 지금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잊혀진채, 마치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살아온 길을 추억하는 것 말고는 없는 것처럼, 고독과 우울 속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어 망각되는 것이 수순인양, 저항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치열한 내면의 전투이다. 시간과의 싸움. 기억과의 싸움. 삐그덕거리는 관절과의 싸움, 얇고 쭈글쭈글한 피부가 견뎌내는 외로움과의 대전투다.
나는 잘못했다.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해안가 외딴집에 홀로 사는 돈 많은 노인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손쉬운 사기 범죄의 표적이다. 그 뻔뻔함 속에 뭔가가 있기를 기대하면 안되는 거였다. 우리는 노인이 계좌에 언제 끝날 지 모를 자신을 위해 현금을 남겨둔다면 가족이든 이웃이든 그녀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탈취해야만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스쿠루지 영감이 비난받은 이유는 돈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늙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홀로 사는 몸도 마음도 취약한 상태의 노인에게 마지막 남은 재화가 아직 노인이 되기 전인 모든 주변인의 표적이 되는 건 ..그건 매일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운전을 하고 거리를 다니는 것처럼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만연화된 일상이라는 것. 그걸 먼저 간파해야 했다. 프리다의 사기 행각은 소설의 핵심이 아니라, 루스의 노년을 설명해주는 배경같은 장치였다.
루스가 앓고 있는 치매는 루스를 루스로부터 소외시킨다. 우리는 연속적인 기억과 그 기억의 작용이 만들어낸 새로운 시간들로부터 자아를 뽑아낸다. 그래서 기억의 단절은 자아의 상실과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이 치매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정보를 주워들은 나는, 그녀의 시점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점에서 모든 상황을 의심하였다. 그녀의 기억은 사실일까? 그녀가 기억하는 키스는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실제로 존재했던 남자일까? 프리다가 조지와 합작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50년 전의 그 감정을 그대로 불러오는 것을 읽으며 먹먹한 슬픔을 느꼈다. 90살이 된 남자에게 18세 소녀가 사랑했던 남자에게 느꼈던 똑같은 지적 열등감과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들... 그 끝나지 않은 노년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밤을 지나면서 여운이 되고, 슬픔을 주었다.
호랑이가 상징하는 건 무얼까. 위엄? 기품? 고독? 위용? 어쨌든 호주의 바닷가 별장같은 집에 홀로 사는 75세 노인 루스는 호랑이를 본다. 호랑이는 소설의 제목에도 소설의 시작에도 소설의 끝부분에도, 소설의 중간중간에도 계속 등장한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독자도 주인공에게도 직접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소리로 왔다가 냄새로 왔다가 요양사 프리다와의 걸레대첩에서 치열한 결투를 끝에 마지막 순간에는 칼에 찔려 잔인하게 죽지만 그렇게 루스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문학적 해석을 어떻게 내리는지 궁금하다. 중요한 건 단지 그녀에게 보였다는 것.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한 존재였다는 것. 위협적이었지만, 그를 보살피던 프리다가 용감하게 죽여버렸지만, 결국 그녀를 그렇게 데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가시기 마지막 한 달간을 병원에서 지내셨던 내 할머니는 나를 키워주셨다. 어린 내가 밥을 안먹는다며 뛰어다니는 놀이터까지 밥과 숟가락을 들고 쫓아다니며 한 숟갈만 한숟갈만 애원하듯 떠먹이며 키우신 내 할머니가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갔을 땐, 이미 내가 그분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댁은 뉘슈' 하는 듯한 그 낯선 표정에 나는 슬픔으로 무너져내렸다. 이미 그 때 할머님이 더이상 내 곁에 안계사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 계신 할머니는 늙어 쪼그라든 몸 뿐, 내 할머니의 영혼은 먼 곳 어딘가에 계셨다.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어라 말씀하셨는데.. 말투는 할머니인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래도 할머니는 그곳에 없는 누군가와 계속 말씀을 나누셨다. 또 다른 날 찾아뵈었을 때는 간호사가 기저귀를 갈아채우는 걸 목격하였다. 아무도... 치매 앞에.. 존엄성을 지키며.. 근엄하게죽을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의 끝 노년은 전투다. 막상 장례식 때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미 병원에 계실 때 내겐 잘있으렴, 인사도 없이 그렇게 떠나셨기에.. 그래서.. 보내드렸기에..
무서운 건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그 내일이 오늘이 되었을 때에도 오늘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소망하면서, 뭔가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지금의 내가, 마치 소녀 때처럼 그때와 변함없는 기억과 감정을 가졌는데, 그것이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걸 문득 문득 깨닫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평범하던 일상 속에 갑자기 5년 전에 세상을 뜬 남편의 부재를 깨닫고, 장성해서 독립한 아들의 존재를 깨닫고, 길가던 이웃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두려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