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매뉴얼
제더다이어 베리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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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않은 세계를 상상으로 창조한 것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인셉션>에서  천재 소녀가 함께 꾸는 꿈을 위해 실험적으로 설계했던 반으로 접히던 도시다. 아무리 현실적인 사람일라도, 그런 종류의 기발하고 환상적인 장면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과학적 파라다임의 벽은 쉽게 사라진다. 중력은 무시되고 시간은 균질성을 잃는다.

 

이 책의 배경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20세기 초 쯤에서 시간이 멈춘 어떤 도시이다. 이름도 없는 시대도 알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몽유병 환자들처럼 꿈 속을 살고, 안개 쌓인 거리는 온통 잿빛이고, 거리엔 매일 비가 내린다. 인셉션의 도시처럼 환상적 신기함이 미로처럼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도시가 아니다. 도시의 외향은 비루한 현실적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현실속에 비현실적 풍경들이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탐정 소설의 주인공 언윈이 매일 비에 젖어 질척거리는 양말을 낡은 구두 속에 신고  자전거를 타고 빗속을 출근하는 곳은 고층으로 올라갈 수록 안개에 점점 히미해지는, 거대하고 높은 건물의 '탐정 회사'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계급과 계급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고,  계급간 대화와 이동, 통신이 차단된 디스토피아적 사회다. 상관과 부하 직원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통제되어 있어서 배달부를 통해 상하층으로 배열된 수직적 계층 구조 사이로 업무가 하달된다. 엘리베이터의 모든 층을 액세스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배달부 뿐이다. 상관이라 하더라도 그 수직 관계에 더 많은 특권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그저 높은 층에 있고 업무가 아래로 흐를 뿐이다. <설국얼차>와 같이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를 빗대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실무자들 사이에서 음성이나 구면을 통해 작업하기 보다는 이메일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현대, 현실의 많은 사무실 작업 환경과 크게 다른가.   효율성 내에서 파생된 공상적 조직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고 읽은 책의 마지막 해설 편에서 듀나라는 필명을 가진 평론가는 엄청나게 많은 전문 작가들과 전문 장르들을 언급하며 '이 모든 것이 장르적 패러디다'라고 얘기한다. 난해한 책의 해설까지 난해할 필요가 있을까만 어쨌든, <탐정매뉴얼>은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단서를 모으고 추리를 한다는 점에서는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배경과 몽환적 공상적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는 환상 혹은 공상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읽기가 어려웠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 관계를 추리해야 했고, 부분 부분은 읽을만 해도, 전체 속에 하나로 연결되는 서사구조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여기 저기서 이야기는 단절되고 단절된 부분들은 한참 뒤에 다시 계속 언급되며 찔끔찔끔 설명된다.  너무 많은 세부사항들이 사건의 단서와 혼동되어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언윈은 꿈을 세세하게 꾸는 사람이다. 꿈 속의 세부 사항, 현실 속의 세부사항이 한첨 뒤의 어느 지점에 가면 하나로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단서로 알고 읽어 나가다 보면, 또다른 세부 사항이 합체했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건물의 14층 소속 서기인 언윈에게  갑자기 주어진 탐정 일에는 매뉴얼이 따라온다. 언윈이 읽은 구절 '세부 사항을 단서로 혼돈하지 말아라'라는 부분은 독자에게는 단서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말장난이다. 독자는 어떻게 세부사항과 단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장면이 무엇을 왜 어디에서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도 힘든 판에 말이다. 

 

1/3 쯤 되었을까. 어떤 지점이 지나자 나는 조금씩 이런 몽환적 방식의 서술이 익숙해졌다. 이 소설의 이질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나면, 새로운 장르로서 그리고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호응하며 처음에 기대했던 추리소설의 형식적 익숙함를 잊고 이 새로운 장르의 소설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된다. 그 이질적 요소란 이런 것들이다. 


꿈과 현실이 모호하다. 작가가 꿈과 현실을 수수께끼처럼 왔다갔다 하는 건 아니고, 꿈은 꿈이다 라고 명시해 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의 관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현실이 꿈을 모방하는가 꿈이 현실을 모방하는가. 현실 속의 사람들은 잠든 채 꿈을 모방하고 꿈 속의 세부사항들은 사건 해결의 단서처럼 의미 심장하다. 이런 것들의 파악이 힘들어서 앞뒤로 책장을 넘겨가며 읽다가 어느 순간, 독자로서의 탐정노릇을 포기하고 나니 흥미로운 요소들이 거기에 별처럼 반짝거린다. 다시 말해, 어릴 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읽거나 <인셉션>같은 영화를 볼 때의 기이함에 촛점을 맞추니, 이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새로운 눈이 떠졌다.

 

이 소설은 탐정 소설이 아니다. 물론 듀나의 설명처럼 장르적으로 탐정 소설의 형식을 고루고루 갖추었으므로, 장르적 패러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탐정 소설, 범죄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교묘하게 독자를 혼란에 파뜨리는 작가의 함정을 우회해서 읽는다면 이제까지 읽어온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소설을 읽는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이 탐정소설이 아닌 이유 첫번째, 이 소설에서 죽음은 끔찍하지 않다. 살인은 범죄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끔찍하고 참혹하고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은 인간의 절망과 욕망을 드러내는 장르 소설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죽음은 우스꽝스럽다. 살인 사건의 목격은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그 이후에도 총을 쏘고 죽고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 죽음들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볍다.죽음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요 동력이 되지 못한다면, 그 소설은 범죄 소설, 탐정 소설일까?  두번째로 대개의 장르소설에서처럼, 비밀이 천천히 드러나는 방식은 소설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높여줌으로써 마치 탐정소설과 같은 효과를 주지만, 결국 그 인과관계가 설득력이 없다. 현실적이지 않은 배경속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목적들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있고, 지나간 사건들의 오류 속에서 현재의 사건들이 발생하지만, 그 인과관계를 밝히기엔 불충분한 심리묘사 불충분한 인물의 성격들로 답답함을 준다. 대신 사건이 진행되며 사건이 설명된다.


그러므로 독자로서 탐정 소설을 읽으면서 으레히 가지게 되는 왜 라는 논리적 필요조건을 포기하고, 엘리스가 동굴에서 만난 많은 기이한 것들처럼 그 기이한 현상들을 즐기면서, 꼬이고 꼬인 사건들이 풀려가는 과정을 읽어가면 된다.  그것이 이 책을 재밌게 읽는 방법이다.

 

이 소설이 유일하게 어떤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꿈과 현실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 속에도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가 이야기의 일부로서 나오지만, 이 책은 전체로서 호접몽과 같은 알레고리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장자가 꾸었다는 나비의 꿈, 나비가 꾼 장자의 꿈. 거기에 탐정적 형식을 취해 디테일을 가미한 것이라고도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들은 꿈을 통해 의식을 제어한다.  사건의 발단도 꿈 속에서 있었고, 사건의 해결 역시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이상한 탐정 회사의 비밀은 무의식을 수사하는 임무를 맡은 감독관이라는 계급의 존재에 있었다.  그리고 꿈의 탐정이라는 세계가 그려내는 환상적 디테일은 이 소설이 가진 가장 독자적이고도 위대한 영역이다. 컴퓨터도, 스마트 폰도 없이, 어떤 최첨단의 장치도 부재한 약 1950년대 쯤으로 추정되는 애매한 아날로그 시대에, 읽기 전용의 재생 꿈과 같은 개념을  가진 레코드판 주파수가 등장하고, 죽은 자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단서를 찾아 꿈의 형상을 소리로부터 재생해 내는 모습은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열어준다. 의식을 지배하기 위해 꿈 속에 들어가지만, 결국 그 꿈에 갇히고 마는 모습, 누가 누구의 꿈에 있는지 꿈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사실은 현실이고 현실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꿈인 것은 아닌지.. 이런 몽상들을 하면서 따라 읽는 <탐정매뉴얼>을 읽는 내내 잠과 꿈과 같은 몽환적 서술 때문인지 자주 잠이 왔고, 실제로 여러 차례 책을 읽다가 잠들게 했지만, 문학은, 예술은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성스러운 작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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