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백성호 지음, 권혁재 사진 / 판미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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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에. 그런 물음은 어리석다. 네 마음에 있다.  진부하고 공허한 답변이 삶과 앎의 배경음악처럼 늘 울리지만 구체적인 행복은 좀처럼 손 안에 쥐어지지 않는다. 행복에 대한 담론 쯤이라고 해두자. 그게 더 맞다. 답이 없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 답을 구하지도, 주지도 않았다.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쉽게 이게 행복이다 저기에 행복이 있다 라고 말하면 사기가 되는 것. 그게 행복이다. 대신 상처와 치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상처와 치유를 떠나지 않고는 행복이란 단어가 있을 수 없는 걸까?


존 부룩만의 에지 재단에서는 전세계 여러 분야의 많은 대표 석학들에게 한 가지 주제 하나의 문장으로 된 질문을 주고 글짓기 숙제를 내준다. 그걸 다 모아다가 책을 낸다. 그렇게 각 분야에서 가장 선두에 선 석학들이 내놓은 대답을 따라가면 그 답들의 교집합이 진리를 향해 뻗어간다고 존 부룩만은 믿는 듯하다. 그러나, 각 분야의 가장 뛰어난 석학들이 자신이 가진 최고 지식을 반영해 내놓은 대답은 모두 제각각이고 하나로 수렴되지 못한다. 그 제각각의 답들 중 무엇을 얼만큼 취해 어떤 방식으로 조함할 지는 독자의 몫이다. 이 책 역시  '17명의 대표인문학자가 꾸려낸 삶의 프레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에지 재단의 책처럼 그들에게 '행복'이라는 주제의 에세이를 걷어들여 묶은 것일 거라 생각했다. 그 경우 모 아니면 도다. 숙제하듯 마지못해 쓴 글들이 있을 수 있고 세계 최고 석학 최고의 글들도 만날 수 있다. 오판이었다. 저자가 직접 쓴 책이었다.  


언론인 백성호님은 행복이라는 화두를 들고 직접 한국의 대표 인문학자  17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서로 이질적인 17인들의 생각들을 자신의 언어로  모아독자 사이에 푹신한 쿠션을 만들었다.학자들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 작가가 리드하고 독자와 함께 걷는다.  그들은 음악, 미술, 심리, 철학, 미학, 동양신학, 뇌과학, 건축, 천문학, 시인, 등 온갖 종류의 필드에서 대표적인 전문가들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인문학자들이 그들의 학문 경계 내에서 통용되는 조금 일반적이지 않은 단어를 쓰면, 독자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그 경계를 허물어 내고 전문적인 말의 개념과 뜻을 쉽게 풀이했고, 그들의 생각에 자신의 해석을 보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다듬었다. 이해해야 하는 개념을 공감할 수 있는 문장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과학도, 신학도, 철학도, 종교도, 심리학도 저자를 통해 산문이 되었다.  그는 서문에 '각 분야에서 자기 나무 한구르를 꿰뚫은 그들은 그 나무를 통해 전공 분야를 넘어 더 큰 세상을 조망하고 있었으며 이 책은 그들이 바라보는 풍경을 이어붙인 삶의 지도'라고 썼다.


백성호가 만난 사람들

이들은 한국 대표 인문학자지만,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재다능한 미학자 진중권,역사연구가 이덕일, 통섭을 추구하는 동물학자 최재천, 가야금 명인 황병기, 기생충 학자 서민, 과학철학자 장하석 정도다. 진중권과의 대화는, 그의 다른 책이나 에세이에서도 했던 말의 반복이지만, 언제나 명쾌하고 쾌활했다. 힐링 이데올로기에는 상처와 근원을 외면하려는 얄팍함이 숨어있음과 함께 예술이 감동과 함께 힐링에만 의존하게 될 경우 상처를 부르는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게 되고, 모든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귀결시키면서 패비주의로 전락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예술의 시각에서 행복에 대한 담론애 접근해가는 과정에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다. 


여성의 정치 참여? 100여넌 전만 해도 어림없었어요. 중략. 예술은 이처럼 주류 사회와는 다른 소수자의 시각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낯선 충격을 가져다주죠. 동성애자의 시각, 여성의 시각,... 그런 아웃사이더들의 세계가 나중에는 주류 사회에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의 몰이해로 상처받던 이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거죠.

그렇다. 그는 행복을 말하는 여정에 소수자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 안에서 예술의 역할을 역설했다. 또한 삶이 게임이 될 때, 우리는 상처와 고통 속으로 깊이 빠져들지 않는다며, 영화를 보면서 빠져드는 고통과 상처에 허구라는 울타리가 지켜주듯,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절한 가벼움과 적절한 즐거움을 비벼가면서 삶을 놀 필요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변씨와의 언어 유희, 옳고 그름을 떠나 다수라는 폭력적 인터넷 답글에 맞서는 소신있는 자세를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남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살다가 삶이 자기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에는 삶의 노선을 수정할 것을 권유한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바라보는 상처와 치유에 대한 통찰이 인상 깊었다. 그는 내가 스스로 만든 불일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이라고 했다. 대뇌피질이 자신의 예측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상처를 받으며  내가 어떤 일에 대해 특정한 기대나 바람을 가질 때, 그게 어긋나면 고통이 시작되는데,  가끔 신체 기관들이 전해 준 정보를 전기적 신호로 바뀐 것을 잘못 해석해 뇌가 속임수를 당하는 일이 벌어지므로, 진짜로 아픈 건지 돌이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가 김개천은 자신의 작품 <한칸집>을 소개하며, 자기 것이 많으면 지키려 하고, 지키려다 보면 바깥을 향해 닫히기 일쑤라는 말과 함께, 비어있는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자연이 흐르고 생명이 흐른다고 답하였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는 불행 없이 행복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 안의 행복과 불행을 잘 볼 수 있느냐를 물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상처와 치유에 대해서는,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 치유의 과정이라고 했다. 


나는 <온도계의 철학> 캠브리지대의 석좌 교수 장하석의 말이 가장 좋았다. 그는 <과학 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의 말을 빌어, 과학은 빅뱅 이전의 문제와 같은 심오하고 답이 안나오는 뿌리 깊은 문제들을 접어 놓고 나서야 비로서 접근할 수 있다며 한 후, 과학과 철학, 혹은 과학과 종교 그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건 결국 인간이라며, 당대 과학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틀 '파라다임'이라는 용어를 되짚었다.  그 파러다임의 틀 안에서 어떤 현상이 설명될 수 있으면 과학이고, 그렇지 않으면 과학 밖의 영역이 된다. 그래서 과학이란 전쟁과 함께 국경이 바뀌듯 그 경계가 계속 바뀌는 것이며, 절대적인 철학, 절대적인 과학 이란 것은 없다, 아 이렇게 하면 풀리겠네 하고 과학적으로 방법을 찾으면 신의 영역이었던 부분이 그 때부터 과학으로 바뀐다, 그러니 우리가 과학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언젠가는 선조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믿음처럼 한순간 허물어질 지 모르는 것이다.  그의 요지는 이 점이다. 인간의 삶에도 패러다임이 있다. 그것은 각자가 세상을 보는 틀에서 만들어진다. 세상은 우리가 만든 틀 안에서 벗어나기 일쑤이며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불행해진다고 했다. 


과연 내가 만든 틀은 행복을 부르는 걸까. 행복을 방해하는 걸까. 우리는 그 틀을 세워야 하는 걸까. 아니면 무너뜨려야 하는 걸까.

역사학자 이덕일은 시간은 직선이 아닌 순환의 고리라는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미래에 대한 선택은 현실이 되고, 다시 과거가 된다. 과거는 또 미래를 선택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우리 시대의 삶이 100년 전, 200년 전, 500년 전의 역사가 됐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거울로 기억될까. 라고 물으며 인간은 돈과 권력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할 때 행복하다는 답을 전한다. 


동양철학과 고전에 능통한 한형조는  유교에서 행복을 찾는다.  자신에 대한 비난이 정당하면 자기 발전의 밑걸음으로 삼고 부당하면 무시하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유교는 성찰의 학문이지 위로의 학문이 아니다. 라는 말로  행복에 대한 자신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그 역시 우리사회가 위로라는 설탕을 과잉 투여해서 당뇨병에 걸릴 지경이라고 말하며 힐링 산업의 얄팍한 속성을 주지시킨다. 주어지는 운명에 순응하되 그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능동성도 지니라고 말한다. 어설픈 위로에 대한 기대를 접는 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길,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유교적 방식의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다.


저자가 만난 거의 모든 학자들이 상처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답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이야기를 경험을 늘어 놓는다.  상처를 말할 때 자신의 경험 없이는 이야기가 안되는 것처럼. 내놓으라 하는 학자들도 상처를 이야기하는 도중 본인을 객관화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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