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재의 시작은 어디부터일까
. 수정하는 순간의 최초의 접합체, 그 아무것도 없는 단순하고 투명하고 균일질의 상태에 이미 나란 존재적 잠재성이 스탬프처럼 찍혀져서,
앞으로 존재하게 될 나의 모든 것이 "정해져"있는 걸까.
리처드 C. 프랜시스가
쓴 쉽게 쓴 후성유전학에서는 위의 질문에 대해 아니다라는 답을 옹호한다. 200여개 종류의 줄기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그 가장 처음의 하나에
이미 인간의 모든 것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전성설(preformationism)이다. 유전자는 그 이론을
지지하기에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정선설에서 보는 '드러난 나'는 발생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정선설은 유전자가 지시를 내리고 세포가 그 지시를 따른다는 관점을 공통점으로 하여 연구의 흐름에 따라
"청사진","조리법","프로그램"으로서의 유전자에 비유되어 왔다.
반면, 후성설(epigenesis)은 발생을 통하여 내가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 발생은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후성설의 기본 입장이다. 접합체 속의 유전자들이나 다른 생화학 분자들이 생명의 고유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이미 형성된 나로서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성설과 후성설 사이의 논쟁의 중심에 있던 독일의 과학자 한스
드리슈는 성게의 수정 직후 첫 세포 분열 과정의 초기 분화 단계에 개입해 분열된 세포들을 분리하여 각각의 분화된 세포들이 완전한 성게 유생으로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이른 배아 단계에서 각 세포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발생을 조절함으로써 온전한 배아로 자란다는 결론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발생의 더 나중 단계에서, 세포 환경이 유전자 조절에 관여한다는 상호 인과관계를 발견했다. 그의 연구가 심화될 수록 그는 점점
더 발생의 복잡성에 압도되어 모든 자연주의적 설명을 버리고 결국 철학자의 길을 걸었다. 후성학의 발견이라는 생물학적 연구적 환경이 그의 인생의
궤도를 180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세포의 운명은 다능성 단계를 지난 후에도 배아에서의 위치, 이웃 세포들과의 화학적
상호작용에 크게 좌우된다. 후성설의 가장 큰 난제는 어떻게 단순하고 균일해 보이는 상태로부터 훨씬 더 복잡하고 질서정연한 상태가 탄생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후성유전학이 이를 설명한다.
책의 도입부에서는 네덜란드의 나치 점령군이 퇴각하며 내린 봉쇄조치로 인해 생긴 약
8개월간 기근 기간 동안 태어난 아기들의 몸무게와, 그의 자식, 그리고 손자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관찰을 통해 태아때의 장기적 기근이
높은 우울증, 비만율, 정신분열증, 반사회적 성격장애, 당뇨 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후성유전학의 바탕 위에 소개한다.
이어서, 리처드 C 프랜시스는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악명을 떨친 미국의 메이저리구
야구선수 칸세코의 사례를 통해 만성적인 스테로이드 복용이 어떻게 후성유전학적으로 몸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작용을 설명하고, 포유류의 양육방식과 스트레스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질환들이 대를 이어 후세에 까지
영향을 주는 사실을 주지한다. 테스토스테론으로 몸속의 자연적 테스토스테론 생산을 중단시키면서 우울과 성욕감퇴를 겪고, 테스토스테론 대사의
부산물중에 발생하는 에스트로겐 호르몬 수치가 올라가면 고환이 쪼그라들고 발기부전을 겪는다. 인체의 생리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진화된 스트레스
반응은 생식에서 면역까지 거의 모든 생리적 체계들과 관련되어 있다. 세포핵 수용체와 결합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손이 태아의 폐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처방된 경우, 높은 코르티솔 수치를 경험한 태아는 자라서 스트레스 축이 평생 과다 반응성을 보여
심장질환과 당뇨를 포함한 여러 질병의 발생률이 평균보다 높고 수명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장애를 겪을 가능성도 높았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이것은 홀로코스트 때문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PTSD와 우을증의 발병률이 높게 나타났던 연구, 기니피그의 부적절한 모성
행동이 세대를 통해 자식 기니피그의 코르티솔 수용체의 유전자 반응성에 영구적 영향을 남기는 연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쉽게 썼다고는 하나) 전문적인 생리 메카니즘을 모두 따라가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았으나, 후성유전학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 복잡한 생리 작용의 기초를 꼼꼼히 기술한 저자의 성실성과, 전문 독자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하도록 다양한 사례들을 각 챕터의 도입부에 소개하고 이론과 사례의 적절한 연결을 통해 이해를 돕는 저자의 서술 방식을 높게 평가한다.
뭔가를 더 알아간다는 건, 더 알아야 할 것들과 더 생각해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후성유전학은 정도의 문제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발생 과정의 어디부터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는, 발생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달라지는 인간성의 정도를 파악하는 문제이며, 이것은 사회적이고 정서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면에서의 합의로
결정될 문제이다. 고로 "유전자+알파 = 나" 의 문제는 더 읽어야 되고 알아야 되고 더 경험해야 하고 더 살아야 하는 철학의 문제로
귀결된다. 철학자가 된 유전학자 한스 드리슈의 끝없는 탐구 정신이 책의 한 귀퉁이를 통해 흐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