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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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역사는 시대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한다. 시대의 폭력은 개인적 삶에 우연히 조우하여,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며 기억의 구석 구석 개인의 역사에 스민다.


아주 오랜 오래전 모래 시계라는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쌀을 샀다며 우는 장면이 있었다. 그녀는 배가 고파서 쌀을 샀다고 하면서 울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자 변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광주가 총소리에 휩싸여 소외되고 있을 때, 그 때  그 자리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우연성은 그 묵직한 시대적 청춘을 관통했던 지식인들에게 씻지 못할 죄책감을 심었다. 쌀을 사는 것은 그 어두운 시대적 정의와 자유를 열망하는 청춘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행위였으며, 그 무거운 시대적 사명감을 내 어깨에서는 내려놓고, 먹고 살겠다는 변명이었으며 또한 배신이었고, 긍극적으로는 변졀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 책 속의 또다른 고현정분인 등장인물 상희와는 달리 한 칸짜리 자취방을 나와 원래 그녀가 있었던 그 자리 착취의 억압의 주체로서, 재벌의 딸로서 되돌아갔고 핍박의 칼을 휘드르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섰다.


그러나, 그들도 사랑을 했다. 80년대 90년대, 민주화를 열망하던 폭풍의 눈, 학생운동권, 총학생회에 있어서 여성성은 저속한 여성의 상품화를 대변하는 자본의 상징이었으므로  말살되었고, 남녀의 호칭은 누나, 오빠 대신 형으로 통일되었지만, 그들도 사랑을 나누었다. 청춘의 상징 같은 방황과 불확실함  대신 신념으로,  확고한 사상과 실천적 삶을 살았던 그 때의 청춘들도 사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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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화자가 이끄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6 월항쟁이 있었던 1987 년부터 분신정국이 펼쳐졌던 1991 년까지 4 년에 걸쳐 그동안의 한국 사회를 완강하게 지탱해 온 무언가에 불길이 지펴지면서 그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장엄한 모습 그대로 몰락해갔던' 시간 축을 따라 시공간을 초월해, 일제강점, 러일전쟁, 러독전쟁, 홀로코스트, 독일 노동자파견 등의 크고 작은 역사적 속을 넘나들며 서로 조우한다. 


그 시대의 청춘, 그 무자비한 폭력에 항거하던 그들의 사유는 자유로왔고, 사상은 실천을 동반했다. 그들에게 낭만은 실천적 자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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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의 핵심은 일부일처제가 한 사람만을 위한 영구적인 매음 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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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


김연우는 그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소설임을 짐작케 하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투쟁 현장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차분하게 공개했다. 소설에서 그는 자신의 어떤 정치적 혹은 사상적 견해를 납득시키려 하거나 주입시키지 않지만,  1980 광주에 대한 견해를 드러낸다. 나는 그가 일부러 다시는, 다시는 이라고 강조해서 쓴 그 다음 말, 학살자에게 맞서지 말라 메시지가 슬프다. 그 학살자들은 역사가 진실을 밝혀낸 후에도 죄값을 치르지 않고 그를 동조하고 침묵했던 세력들도 세상 밖에서 활개를 치고 아직도 권력의 끈을 유지하고 있으니, 결국은 비통한 목소리로 저항할 수 있는 말은 다시는 학살자에게 맞서지 말라 역설 뿐.


한기복. 5월의 광주 4년 후,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안고 방한한 교황 암살을 계획했으나 시도도 못해보고 끝나자, 끝내 분신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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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몽속에 잠든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 온몸이 온몸이 부서져라 두들겨대는 종소리녔으며, 다시는, 다시는 맨손으로 학살자에게 맞서지 말라는 처절한 격문이었다.


헬무트 베르크, 홀로코스트가 자행될 무렵, 유대인의 피가 반 섞여 있던 그는 행복, 사랑, 기쁨 같은 엄격하게 선택된 긍정의 단어 25 개 내에서만 약혼자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 그는 장교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나중에는 동료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향하는 길에서 희망찬 곡들을 아코디언으로 연주한다. 그러다가 그는 살아남았다. 유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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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의 세계란? 패배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일 뿐 운명은 패배하지 않으니 꿈처럼 지나가는 비극의 삶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웃으라는, 쓸쓸한 목관과 유머러스한 현악의 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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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처럼 침묵은 지붕위로, 골목으로, 창틀로 내려 앉았지.


강시우, 한기수를 만나 분신 사건에 관련된 후, 타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화자를 통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책 속의 주인공. 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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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은 세차게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파도에 본의 아니게 휩쓸린 조개껍질 같은 것이었다. 이런 논리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은 1980 년대식의 죄의식일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런 유의 사랑이란 누구에게든 어떤 식으로든 연민을 배설해야만 견딜 수 있는 시대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라고.

 

다시, 강시우가 사랑한 상희. 그녀는 시대의 죄책감을 괴로워했고, 정의의 사도로 급변조한 강시우를 사랑함으로써 이를 상쇄하려 했던 것 같다. 어두운 시대에 자신이 특권 계급이었던 사실에도 괴로워했던, 그런 어두운 시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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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열등감, 죄책감 등이 압도적인 폭력의 시기를 만나게 되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랑이 감정 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를 일컬어 사랑이라고 말해야할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지만 1980 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감정들, 예를 들어 증오심이나 복수심 혹은 공명심 등을 사랑으로 오인한 것은 분명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깜빡이도 없이 갑작스레 끼어들듯,  소설 속 전개를 나몰라라 한 채  사방에서 끼어들기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소설이란 게,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라든가, 시대적 배경 등을 이해하고 친해지려면 어느 정도는 같은 톤, 같은 정서적 배경을 유지해줘야 읽기가 편한데, 불쑥 불쑥 끼어드는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새로운 인물들은 때때로 난감하다 못해 짜증이 났다. 그래도 꾹 참고 읽다보면, 소설 속 작지만 큰 그 이야기들은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어 만나는 듯, 어떤 큰 줄기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단하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지식의 종류와 양도 크지만, 서로 무관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게 꼬인듯한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때로 독자를 우롱하듯 무자비하게 불쑥 불쑥 끼워넣으면서도, 막상 자신은 담담하게 초월한 듯 끌고 나가 결국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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